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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득, 시안미술관

출생

1950, 서울

장르

회화, 설치

홈페이지

www.art500.or.kr/blog/kimhoduck.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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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_사이, 2013

광목(낙동강 강정보)설치, 1000x150cm(3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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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통한 무애(無碍)의 경지

Ⅰ. ‘지금 여기’와 구도의 차원
예술가에게 있어서 전통은 늘 깨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다. 고여 있는 물은 썩게 마련,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계승인 동시에 극복의 대상이기도 하다. 김호득 역시 항상 그런 태도로 작업을 해 왔다. 30 여 년에 걸친 이제까지의 작업 과정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의 예민한 촉수는 새로움을 찾기 위해 부단히 움직여 왔으며, 그 결과 오늘날 그는 한국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작가, 도전과 실험의 작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작업에 기울인 그의 노력과 열정은 2009년 시안미술관 초대전과 최근의 갤러리 604 전시를 통해 만개한 느낌이 든다. 
특히 <흔들림, 문득-공간을 느끼다>라는 제하의 시안미술관 전시는 ‘문득’이라는 부사가 의미하듯이, 낭떠러지에 몸을 던질 때의 절박함이랄까, 느닷없음 혹은 언외(言外)의 어떤 경지를 말해준다. 그것이 주는 느낌은 ‘흔들림’이라는 어사(語辭)가 ‘공간을 느끼다’라는 언표(言表)와 만나면서 구체적인 시공간의 합류점을 넘어선 어떤 경지, 즉 초월적인 지평을 드러내 보여준다. 모름지기 작가란 자신이 겪은 생생한 체험을 구체적인 매개물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하는 자라고 한다면, 김호득의 경우 역시 그런 체험의 진원지는 현실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몸이 아픈 곳도 ‘지금 이 순간’, 술을 마시는 곳도 ‘지금 여기’라고 한다면, 그림을 그리는 곳 또한 ‘지금 여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는 곳이 ‘지금 여기’라고 해서 그림이 ‘지금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화가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지 알 수 없다. 그 진원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절망하고 수행의 고난을 지속하는 것이다. 이는 특히 김호득처럼 수행성이 강한 작가의 경우 더욱 극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그림은 묘사적 차원이 아니라, 발견 혹은 구도(求道)의 차원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Ⅱ. 일획에 기반을 둔 순간의 미학   
김호득의 작품세계를 잘 대변해 줄 수 있는 구절을 찾다가 <벽암록>의 다음과 같은 글을 만났다. “부싯돌이 반짝하는 순간에 검고 흰 것을 알아보고, 번갯불이 번쩍할 때 생사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면] 시방(十方)을 좌단(坐斷)하고 천 길 벼랑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忽若擊石火裏別緇素 閃電光中辨殺活, 可以坐斷十方, 壁立千?).”  “문득, 그냥, 그대로”는 시안미술관 초대전 도록에서 따온 단어들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나는 평소 이런 단어들을 좋아한다. 지난 봄 많이 아프고 난 후, 좋아하는 단어가 하나 늘었다. 지금.”  그렇기 때문에 ‘지금’을 포함해서 앞의 네 단어들은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어들이라 할 수 있다. 이 단어들 중에서 ‘그냥’과 ‘그대로’는 사물이나 사태의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어사들이다. “손대지 말고 그냥 그대로 둬.”할 때가 적합한 용례다. 앞의 두 단어가 장소성을 지칭한다면, ‘문득’이나 ‘지금’은 시간성을 내포한 단어들이다. 그러니까 김호득의 작업은 지필묵에 의한 한국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개념적인 측면이 강함을 알 수 있다. 
김호득이 언어에 관심을 기울인 때는 1990년대 중반 무렵, <산, 나무, 돌>(광목에 수묵채색, 154x282cm, 1994)에 이르러서였다. 광목에 먹, 갈색, 청색의 물감으로 ‘산, 나무, 돌’을 거듭해서 쓴 것이다. 산을 그리지 않고 ‘산’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대상에 대한 개념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언어를 다루고 있다고 해서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의 <하나 그리고 세 개의 의자>(1965)와 같은 개념미술 계통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코수스가 실제의 의자와 사진의 의자 이미지, 그리고 의자(chair)의 사전적 정의를 병치해서 제시한 반면, 김호득은 그림의 왼편에 농묵으로 산을 암시하는 획들을 대담하게 친 다음 ‘나무, 산, 돌’이라는 단어를 겹쳐 써 산과 돌, 나무가 놓인 자리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념적 산수화를 그린 것이다. 김호득이 이러한 시도는 시간이 훨씬 지난 근자에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써서 앞뒤가 도치된 ‘가’, ‘나’, ‘ㅅ', ‘ㅏ’와 같은 단어나 음소들이다. 그 사이에 점찍기 작업과 폭포 작업과 같은 비워내기, 즉 지난한 수신의 과정이 있었다. 
다시 <벽암록>의 구절로 돌아가면, 김호득이 근자에 시도하고 있는 일획의 방법론은 일필휘지가 가져다주는 호방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의 일획은 온몸의 에너지가 응축돼 터져 나오는 순간의 미학이다. 즉, “부싯돌이 반짝하는 순간에 검고 흰 것을 알아보고, 번갯불이 번쩍할 때 생사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결정되는 기(氣)의 예술인 것이다. 그러할 때 시방을 좌단하고 천 길 벼랑 위에 떠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마치 소리꾼이 오랜 수행을 거쳐 득음(得音)을 하듯이, 비범한 한 그림을 하지 못하면 범속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Ⅲ. 자기부정을 통한 무애의 경지 
김호득의 폭포 그림은 “대우(大愚)의 갈빗대 아래에 바야흐로 주먹을 쥐어박는”(임제록) 형국을 보여준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도지(圖地:figure-ground)의 관계에서처럼 배경(地)이 형태(圖)를 드러내는 꼴이다. 또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법이다. “동쪽에서 소리를 지르고 서쪽을 치는 격”(通典)이니 김호득 자신의 말을 빌리면, ‘문득’ 혹은 느닷없이 대우의 갈빗대를 주먹으로 쥐어박는 형국인 것이다. 
그 자신의 이야기에 의하면 김호득은 술로 인해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녀 온 사람이다. 술의 도취경에 깊이 빠져본 사람이면 그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를 안다. 거기에는 시공간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 없다. 여기가 저기고 저기가 곧 여기이며, 어제가 지금 같고 지금이 내일 같다. 그 걸림이 없는 상태(無碍)에 이르면 만물에 이끌리지 않고 차별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아프고 난 후 ‘지금’이란 단어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김호득의 말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다시 <임제록>의 글을 인용하자면, “세간(世間)에 있어서나 출세간(出世間)에 있어서나 부처도 없고 법(法)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김호득의 그림은 그런 경지를 지향한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이미지 사상(捨象)의 과정을 거쳐 텅 빈 캔버스에 봉착한 서구의 미니멀 회화와는 방법론적으로나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이다.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본래 무한한 자기부정을 통해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에 도달한 자이다. 참사람(眞人)은 일체의 한정을 끊고(絶), 형상을 절(絶)하며,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여 무의 상태에 도달한다(임제록). 김호득의 그림은 다름 아닌 이러한 수행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그림을 통해 지향하는 바는 걸림이 없는 상태, 곧 사물의 형태(形似)에 억매이지 않는 무심한 경지인 것이다. 
시안미술관에서 보여준 설치작업은 하나의 풍경이다. 김호득은 대형 수조 안에 먹물을 풀어 그 위에 걸린, 한 장당 3센티씩 낮아지도록 정교하게 계획, 30장의 흰 한지가 수면에 비치도록 설치했다. 또한 종이죽을 반죽하여 둥글넓적 얇게 빚은 수 백 개의 형태들을 철사에 꽂아 커다란 사각 틀 안에 배치한 설치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간연출은 그가 이제까지 그림을 통해 추구해온 것과는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매우 안타깝게도 나는 이 전시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짐작하건대 매우 아름다운 풍경이었을 것이다. 조명 하나만 켜진 어두운 실내에서 흰 종이의 행렬이 검은 수면 위에 드리워졌을 그 풍경은 얼마나 시적이며 아름다웠을 것인가. 
김호득은 이 설치작업과 병행하여 검은색과 흰색의 종이죽을 손으로 꼭 쥐었다 놓은 형태를 수십 개 전시하거나, 앞뒤로 검게 칠한 한지 더미와 본래의 한지 더미를 수십 장씩 겹쳐 병치한 작품 등등 다양한 설치작업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들은 몸의 현전(現前)을 실제의 사물을 통해 보여준 것으로 회화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시도로 읽혀진다. 형사(形似)에서 사의(寫意)로, 사의에서 다시 실제의 사물과 풍경으로 김호득의 작업은 새로운 표현의 방법론을 찾아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윤진섭(미술평론가/호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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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구현된 근원적 생명 - 흔들림-문득, 공간을 느끼다

 시골 초등학교가 자연을 품은 현대미술관으로 재탄생한 시안미술관의 전시실들은 전형적인 전시공간과는 거리가 멀다. 울툭불툭하고 비정형적이지만 매력적인 건축공간, 이런 다듬어지지 않은 공간을 이해하고 길들이고 소유할 줄 아는 작가만이 전시공간과 작품 간의 유기적인 만남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 경이로운 예술공간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호득은 공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화가이다. 그는 마치 초원에서 먹잇감을 사냥하려고 사방을 둘러보는 야생동물처럼 시각, 청각, 후각, 촉각, 그리고 온몸의 말초신경을 곤두세워 공간 탐색에 몰입한다. 공간을 점유하고 나아가 공간과 놀이를 하기 위해 그는 먼저 직감으로부터 파생하는 예민한 전율 속으로 자신을 던진다. 직관을 토대로 공간과 작품의 상호의존관계를 모든 측면에서 철저히 분석하고 구축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공간 전체가 거대한 작품으로 변모하게 된다. 전시 오픈 일 년 전부터 작가와 기획자는 이번 전시를 화면 속 ‘공간놀이’가 실제 공간으로 확장된 작업으로 구성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공간놀이’는 김호득이 자신의 화폭을 대하는 행위 혹은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나, 마음의 「흔들림」, 또 채움/비움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우주의 기운과 삶을 관계 짓는 「사이」, 그리고 우연히 떠오른 생각 혹은 찰나적 깨달음을 일컫는 「문득」과 같은 추상적인 테마를 수묵으로 작품화하면서 시도했던 '공간유희'를 시안미술관 공간에서 「흔들림-문득, 공간을 느끼다」라는 타이틀로 집대성시킨다. 그에게 공간은 자신의 삶을 드러내며 감동을 '현재화'시키는 매체이고, 이를 위해 스스로를 완전히 헌신하였다.


짧은 멈춤들, 그리고 긴 호흡

 김호득은 1층에서 3층으로 이어지는 시안미술관 전시실들을 몇 번의 짧은 멈춤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한 번의 긴 호흡으로 연결되도록 동선을 구성했다.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전체를 보고자 하는’, 격렬함이 사라진 자리에 내면의 성찰이 쌓이고 ‘그것들이 모여 커다란 기(氣)를 이루도록 노력’한다는 작가의 예술적 의지가 일말의 군더더기 없는 절제된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번 전시 「흔들림-문득, 공간을 느끼다」의 핵심은 사물과 세계에 대한 동양적 사유와 미학의 근간인 기를 지극히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점이다. 한 번의 긴 호흡으로 풀어낸 듯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연결된다. 그런 탓에 이번 전시는 거의 무심의 경지에 이른 느낌을 주지만 실은 작가의 철저한 공간 분석과 치밀한 계획 아래 매사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고 구축된 결과로 탄생했다. 미술관 각 층의 전시실 공간은 ‘만지다’, ‘보다’, ‘느끼다’란 키워드로 세분화된다. ‘상상력과 오성의 자유로운 유희’, 다시 말해 분석적 이성과 감수성의 결합에 의해 빼어난 예술이 탄생한다고 믿었던 칸트의 생각이 김호득의 이번 전시에 구현된 듯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실상과 허상, 평면과 입체, 즉 동전의 양면과 같은 요소들이 대위법적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구축과 해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신체와 정신, 밝음과 어둠, 흐름과 멈춤, 순간과 영원 등 상반되는 이분법적 요소들이 견제보다 상호보완의 실체들로 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상호간의 균형을 끊임없이 유지해야 한다. 예술작품의 창조자 역시 스스로 파괴자가 되어야 하는 역설적인 존재이다. 그동안 김호득은 전통의 파기, 나아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새롭게 탄생하는 창조의 역설을 보여준 작가이다. 화가 김호득이라 하면 그의 작품만큼이나 유명했던 그와 술의 인연이 떠오른다. 단주와 이후 그의 작품에 나타난 변화는 우리 화단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그는 몇 차례 죽음의 언저리를 스칠 정도로 지독히 술을 마셨고, 또 그만큼 자신을 파괴했다. 그는 뿌리 깊은 동양화의 의고주의를 온몸으로 저항하였고, 화격(畵格)에 얽매여 본질을 잃어버린 동양화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동양화의 진수를 ‘지금’의 예술로 풀어내기 위해 외롭게 몸부림쳤다. 창조행위가 실현되고 있는 ‘현재’ 안에서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술이었을 것이다. 생존 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술에 취함으로써 삶의 깊은 고뇌를 잊으려했던 화가 볼스(Wols)의 요절을 아도르노는 ‘인간 볼스의 비극적 결말의 성취’¹라 불렀다. 이런 드라마틱한 결말 대신 지금 김호득은 전통과 혁신을 보다 유연하게 융합시키려는 포용력과 소요하듯 관조하는 삶을 통해 차근차근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가는 과정을 즐기고 있다. 그에게 파괴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진혼곡임과 동시에 전주곡이 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완성이 아니라 작품을 해나가는 과정 자체를 중요시함으로써 물리적인 시간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시간의 역설적인 측면은 우리가 시간이 없다고 여길수록 시간은 점점 더 없어지고, 반면 시간이 많다고 생각할수록 시간은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자세가 이 시간개념을 변경시키기 때문이다.
 올해 초, 작업실을 찾아간 내게 그는 시안미술관 전체 공간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작품들로 각 공간을 연출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에스키스를 보여주었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전시에 이르기까지 구조물 설치에 따른 기술적인 문제점 때문에, 또 한 달 이상 걸쳐 진행된 설치기간 동안 작품과 공간 간의 상호연관성을 고려해 몇 군데 변동이 있었지만 그날 에스키스를 통해 보여준 전시공간의 짜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 전시를 기획하면서 이번처럼 전시 작가의 작업실을 자주 찾아간 예가 없었는데, 매번 김호득은 번뜩이는 감각으로 공간과 내밀하게 호흡하는 작품을 구상하고 발전시켜 나를 놀라게 했다. 이는 전시할 공간을 수도 없이 찾아가 온몸으로 공간을 느끼고 공간과 혼연일체가 된 그의 열정과 노고 덕분이라 하겠다.


촉각적 공간
  
 먹과 한지의 다양한 변주로 정신적인 공명을 공간에 울려 퍼지게 하는 이번 전시에서 1층 전시실은 ‘흔들림-문득, 공간을 만지다’란 테마로 펼쳐진다. 김호득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이 공간에서 지난 십여 년 간 「바람」, 「흔들림-문득」 연작들을 통해 탐구해온 생명력 너머 생명 그 자체를 가시화하는 문제를 지필묵 대신 종이의 물성과 손의 감각으로 풀어낸다. 요컨대 이 문제를 화면 공간에서 무수한 점들로 채워나가는 방법 대신 실제 공간에서 촉각적,물질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필묵의 변주, 필획의 유희가 직접 손으로 그리고 만지는 작업으로 바뀌면서 공간,시간,신체의 절묘한 만남이 극대화된다.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흰 판화지 위로 막 용출된 듯한 검은 점 하나가 관람자의 시선을 낚아챈다. 마치 바르트(R. Bartes)가 말했던 펑툼(puctum)에 대적할만한 이 검은 점은 관람자가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중앙으로부터 화살처럼 날아와 관람자의 가슴을 찌른다. 다시 지그재그로 이어지는 공간을 따라 시선이 이동하다가 다다른 곳, 즉 전시실 양측 벽면 한가운데 지점에는 울퉁불퉁한 큰 검은 덩어리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그 왼편, 유리창을 떼어낸 긴 진열대 같은 벽에는 한지반죽 조형작업들이, 반대편 벽에는 점점 성장하는 큰 점들이 그려진 여섯 개의 갱지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점들의 산란(散亂)과 점철(點綴)이라 불릴 수 있는 「흔들림-문득」과 「사이」 연작에서는 반복되는 점들이 한 점 즉 매 순간에 구현되는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관념적 측면에서 나타냈다면, 1층 전시실에 나무 프레임 안이나 패널 위에 질서정연하게 붙여져 있는 희고 검은 점-덩어리(한지반죽 조형)들은 스스로 생명을 지닌 물체로 당당히 존재한다. 작가의 신체 행위의 흔적이 한지의 물성 안에 ‘응축화’된 상태의 이 점-덩어리들은 나무 프레임으로 구획 지워진 공간에 위치한 동시에 그 자체가 또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역설적인 존재가 된다.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점-덩어리들은 마치 채집된 나비처럼 24개의 나무 프레임  - 보다 정확하게는 한 면이 없는 나무 상자 - 한가운데 핀으로 꽂인 상태로, 또는 나무 패널 위에 부착된 상태로 마치 호객 행위를 하듯 우리의 시선을 유혹하고 있다. 이 점-덩어리 안에는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시간의 유일성과 지속성이 녹아있다. 궁극적으로 수묵화의 본질인 획, 그리고 획의 시원인 점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작가와 유희하는 공간, 마침내 신체와 정신이 합일하는 공간의 탄생으로 완결되는 것이다.
 작가는 지난겨울부터 한지반죽으로 납작한 점들과 손의 궤적이 단숨에 응집된 작은 입체를 천 개 이상 만들었다. 눈을 감고 촉각의 묘미를 탐닉한 한지작업은 가시적인 세계 너머 사의(瀉意)적 세계로 한층 더 나아간 결과인 동시에 물질 안에 육화된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은 손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믿었던 포시옹(H. Focillon)이 "정신이 제아무리 대단한 수용력과 창의력을 지녔다고 해도 손의 협조가 없었다면 그냥 내적 동요에 머무르고 말았을 것"²이라고 했듯이 한지작업들도 손가락들과 손바닥의 힘이 절묘하게 조절된 덕분에 작품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시장 벽에 직접 그리거나 종이에 그린 그림들도 작가의 손과 그림표면 사이의 내밀한 접촉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전시장 벽에 콩데를 손으로 문지르거나 종이 위에 미세한 안료가루를 접착제 없이 오로지 손끝과 손바닥이 발산하는 열로 고착시키는 과정에서 작가의 신체와 그림표면 사이에 들숨과 날숨처럼 긴밀한 호흡이 교차한다. 촉각은 우리가 모태로부터 받는 최초의 감각으로서 우리의 오감 중에서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피부접촉으로 유발되는 쾌락은 감관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존재론적 사건으로 작가의 감각을 칼 날 위에 서게 한다.
 20세기 서구미술의 한 축이 비물질화로의 여정이라면, 김호득의 작업세계는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를 여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바람/흔들림/문득/사이란 주제의 작품에서 점찍는 행위의 무한반복은 화면의 물성을 무화(無化)시키거나 비물질화하려는 의도와 맞물려있다. 한편, 붓질의 반복으로 먹이 완전히 침투된 검은 한지들과 원래 상태의 흰 한지들이 각각 100장씩 켜켜이 바닥에 쌓여진 1층 소전시실에서는 종이의 물성 그 자체가 강조되어 있다. 특히 흰 종이들은 두루마리 상태에서 금방 펼치진 흔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는 또한 흑과 백으로 분리된 먹과 여백 너머에 있는 근원적 세계에 대한 물음을 묵시적인 검은 획의 분리와 만남으로 해석한 「사이」 연작의 물리적인 공간 이동이기도 하다. 깜깜한 공간에서 검고 흰 종이의 집적은 낮은 촉수의 조명 아래,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투명 아크릴 지지대 위에서 살짝 공중부양된 상태로 보인다. 실상과 허상을 교묘히 넘나드는 착시놀이는 미술관 2층 전시실로 이어지고, 3층 전시실에서 극대화된다.
 

'봄'(見) 공간

 1층 소전시실처럼 2층 전시실에서도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건 흰 점-비정형적인 동그라미들-위로 내려오는 침침한 한줄기 빛뿐이다. 때로는 한지반죽으로 만들어진 납작한 점들이 검은 연못 위에서 상승도 하강도 없이 멈춘 상태에서 지극히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무중력의 공간 표현을 통해 우주의 무한함으로 다가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검은 바닥 주변을 에워싼 40cm 정도 높은 공간에서 바닥을 내려다보던 우리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진다. 무심히 바닥으로 툭툭 던져진 듯한 점들이 실은 검게 칠한 가는 철사 구조물 위에 살포시 얹혀져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점들의 그림자가 삼차원 공간의 환영을 강조하고 있다.
 ‘흔들림-문득, 공간을 보다’라는 테마가 안내하듯이 2층 전시실에서는 ‘봄’의 감각기관인 눈에 의한 경험과 지각이 강조된다. 일견 동양적 사유로서의 ‘보다’라기보다는 인식작용에 미치는 눈의 영향력을 신봉하는 서구적 사유에 더 가까워보인다. 작가는 여기서 단순히 일루전의 창출 vs 평면성이라는 퇴색된 서양회화의 담론을 되새기는 걸까? 혹은 평면에 투영된 삼차원 공간의 일루전을 빗대는 의도일까? 일루전 실험이라면 차라리 미술관 1층 전시실 벽에 나열된 여섯 장의 검은 점 드로잉이 더 적절한 예가 된다. 검은 점은 농담을 달리한 경계선 위에서 뭉글뭉글 확장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면의 2/3에 해당하는 윗부분을 조금 짙게, 나머지는 옅게 칠한 기법은 평면에 깊이를 주는 장치가 된다. 점들이 점진적으로 커지면서 전시공간에서 제식(祭式)의 효과를 거두며 힘이 고조되고 있다.
 김호득의 이전 그림에서 점은 또 다른 점으로 연결되었고, 확연한 미래를 알 수 없는 점의 반복이 수평적으로 무한 공간에 다가갔다. 그러나 2층 전시공간에서 점들은 그것들을 가두고 있는 테두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계가 확실한 공간에서 점들의 확산은 관람자들의 시선을 수직적인 깊이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낸다. 높은 위치에서 서서히 거닐며 바닥을 내려다보던 관람자들은 어느새 그들의 시선이 점들과 검은 바닥, 즉 평면 너머 심연, 즉 관조의 세계로 침잠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수직의 평면은 게슈탈트 심리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프레그난즈(pregnanz)의 평면, 즉 승화된 평면이라 하겠다. 김호득은 눈으로 본다는 전제를 교묘히 역전시켜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본다는 전통화법의 맥과 얼을 계승하고 있다.


흔들림, 문득, 그리고 공간을 느끼다

 어두운 공간에 들어서면서 탄성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공간의 마술이 선사하는 감동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무구(immaculacy)의 표상처럼 빛나는 순백의 종이는 허공에 멈춰져있다. 먹물의 호수 위로 흰 종이의 도열이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지막 3층 전시장은 천정에서부터 바닥으로 점진적으로 떨어지는 한지들이, 먹물로 가득 채워진 야트막하지만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수조에 반영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반영 효과는 좁고 긴 전시공간에서 공간의 확장과, 이번 전시의 라이트모티브인 비움과 채움, 실상과 허상의 변증법이 지속되는 시공간을 창조한다. 모든 것이 무(無)로 귀결된 상태에서는 실상과 허상을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물체의 부재로 가득 찬 흰 종이에서 감성이 잉태된다. 그리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주체, 즉 무는 이 먹물 속에 존재한다. 김호득은 여기서 자신이 그동안 해온 모든 것을 무로 환원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무는 단순히 텅 빈 공무(空無)가 아니라, 모든 존재를 생겨나게 하는 무, 무한한 잠재성으로서의 무이다. 즉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갖지 않는 무극(無極)이다.
 30cm 간격으로 3cm씩 낮아지는 한지의 결 마지막 자락이 수면에 거의 맞닿은 지점에서 대기의 흐름이 멈춰져 버린 듯하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현상이 조응하면서 멀리 떨어진 곳이 한 순간에 다가오는 이곳은 벤야민(W. Benjamin)이 말하는 아우라, 즉 '멀고도 가까운', '시간과 공간의 어떤 특별한 짜임'이다. 지금 우리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한가운데 서 있다.
 잔잔한 진동을 멈추지 않는 수조의 물결은 사람의 숨결로 나뭇잎이 흔들리듯 천정과 벽면에 미세한 선들의 순환을 끊임없이 생성하면서 생명력의 원천을 반영하고 있다. 보일 듯 말듯 멈추지 않는 물의 움직임은 세상의 첫 아침에서부터 우리의 기억을 은유하는 매체가 되어온 동시에 무위자연의 섭리를 내포하고 있다. 들릴 듯 말듯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 절제의 미학으로 승화된 공간을 한가롭게 거닐거나 무심히 앉아서 관조하는 관람자들은 각자 자유로이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전시 마지막 날, 천정에 걸려있던 흰 종이들은 하나씩 낙화처럼 먹물의 호수 속으로 떨어져 그 속에 잠기고 먹물과 완전히 동화되어 버릴 것이다. 소멸의 무한한 깊이에서 부재와 존재를 동시에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극도의 무(無) 한가운데서도 어떤 것이 발생하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줄 것이다. 생명을 다함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배태를 예고하는 이 전시의 마감은 김호득이 앞으로 열어갈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예고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진행될 것이다.


¹ T. W. Adorno, Theorie esthetique, traduit. de l'allemand par M. Zimenez, Klinck. Paris, 1989, p. 117
² H. Focillon, La vie des Formes -suivu d'Eloge de la main-, Quadrige/puf, Paris, 1985, p. 109.

박소영(독립큐레이터/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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