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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백정기, OCI 미술관

출생

1981, 서울

장르

설치, 사진, 미디어

홈페이지

www.jungkibeak.blogspo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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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주술: 새싹, 2015

식물색소 프린트, 120 x 16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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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머니즘, 공학, 미술 - 백정기의 작업에서 과도적 영역들

1. 미술사적 모델: 시대착오거나 영리한

샤먼으로서 미술가20세기 여러 예술가 모델 중 미술 전문가 그룹과 대중이 동시에 매우 선호했던 모델이다. 아방가르드의 이름 아래 전복적이고 우상파괴적인 미술이 이때 전복과 우상파괴의 대상은 미술이라는 고정관념 및 기존 체계에서부터 사회 전반의 인습, 이데올로기, 제도, 체제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데본격화되던 시기, 지극히 주술적이고 비의적인(esoteric) 미술가상이 주목받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과학과 산업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이 재편되고, 객관성과 효율성과 합리성이 집단 내외부의 삶을 규율하던 당대 패러다임의 반작용으로 샤먼으로서 미술가상과 아방가르드 미술이 한 궤도에서 흥행할 수 있었다는 점을 발견해야 한다. 요컨대 그때 작가와 그/녀의 작업은 시대의 정신구조(mentality), 상황, 조류, 태도, 분위기에 내재하는 경직성과 폐쇄성을 깨뜨리는 낯선 무엇이었다. 혹은 현실적 세계와 비()/()현실적 세계를 미적으로 중재하는 행위, 사태를 과장하고 실체를 증폭시킴으로써 세상의 비가시성과 비의성을 드러내려는 감각 지각적 욕망의 실행이었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한 백정기의 미술에서 또한 위와 같은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젊은 작가의 작업에서 그 점은 20세기 과학의 시대에 주술적 예술을 표방한 미술사적 모델만큼이나 일견 시대착오적이다. 작가는 이를테면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과학과 산업은 물론 자연 기후, 생명 의료, 문화 저변까지 촘촘히 관리되고 숨 막히게 재조직되는 시대에 예술가의 염원을 담은 허술한 마법적 의례, 위약(placebo)에 가까운 민간 처방, 무모한 육체노동과 수공적 표현을 의식적으로 채택해 작업하기 때문이다.

먼저, 백정기의 유년시절 경험(화재로 인한 손가락 부상과 그 이후 물리적 처치, 아버지의 체벌과 사랑에 얽힌 트라우마)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 '바셀린'(2007) 연작은, 실제 바셀린의 치료적 목적과 효능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셀린'은 현실의 그 약재에 대해 사람들이 객관적 사실을 회피하는 대신 믿고 싶어 하는 바, 즉 비논리적 믿음과 심리적 보상기제를 긍정하고 강화한다. 다량의 바셀린을 머리 또는 손, 심지어 벽체의 움푹 팬 부분들에 두껍게 발라 일정한 형태로 조각(헬멧, 장갑, 땜질)한 그 연작은 보는 이에게 그 미술 자체가 약한 이, 다친 이, 상처, 결여, 구멍을 감싸고 고통과 갈등을 치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실제로는 바셀린의 연성 때문에 전혀 보호 장구 구실은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음, '기우제-모로코'(2008)'바셀린'보다 더 명시적으로 마법적이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사하라 사막에서 바셀린으로 만든 조각(도마뱀*)을 녹이고 다시 조각(나침반)을 만든 다음 결국 하늘로 증발시키는 일련의 과정을 기우제(祈雨祭, pray for rain)”와 동일시하면서 작가는 물이 부족한 지역들이 역사적으로나 민족지학적으로 겪어온 사회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일종의 주술사(shaman)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럼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이제는 기록 영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감상자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기후를 변화시키고, 그렇게 해서 한 공동체의 고질적 문제까지 풀 수 있는 어떤 미술의 마법적 힘을 믿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행위가 객관적 현실에 비춰보든 미술사적 사례에 견줘보든 일정한 시대착오적 면모를 갖고 있고, 다만 은유에 불과함을 간파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맥락과 내용으로 그 작업의 시대착오성과 은유의 한계를 짚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샤먼으로서 미술가의 대표 격인 요셉 보이스는 1960~80년대 동물성 지방과 펠트를 써서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타자와 주체를, 절멸에 이르는 고통과 회생(回生)의 환희를 중재하는 미술을 제시했다. 그런데 동시대 젊은 작가 백정기는 새삼 2000년대에 자연적 질서의 세계와 인간의 갈망 사이 간극을, 현실 사회의 온갖 갈등의 골을 그 과거적 미술과 유사한 심미적 상징 행위로 중재하려 한다. 예컨대 기술에 힘입어 언제 어디서든 인공강우가 가능하고, 오직 자본의 힘으로만 공존공영의 글로벌리즘이 달성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가 현실이 된 이때 미술의 마법적 힘을 보여주려 한다, 등등으로.

사실 '기우제-모로코'를 수행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백정기 스스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도달했다. 자신의 미술이 그저 작업적인 제스처는 아닌지 (...) 예술가로서 늘 어떤 행위를 하고 있지만 단순히 예술적인 관념이나 미학으로만 그친것은 아닌지 자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그러한 자기반성을 계기로 작가 백정기는 이후 샤머니즘적인 태도와 방법론을 떠나 좀 더 과학적인 의식과 기제를 취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과학의 기초가 그렇듯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기, 실증적으로 대상과 관계(사용, 해석, 구성 등)하기, 실험과정과 기계적 조작을 창작과정에서 적극화하기가 작업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백정기의 시대착오성은 작가의 영리함으로 수정 이해될 수 있다. 이는 단지 자기 작업의 한계와 모순을 스스로 깨달았다는 의미의 영리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서 나아가 백정기는 치밀하게 계획했든 우연성이 끼어들었든 자기 작업을 동시대적 조건과는 차이가 있는 미술가상, 예술담론, 기교, 표현방식에서 시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미술사의 선행적 사례를 건드리고, 결과적으로는 현대미술의 과도적/이행적 본성에 부응하는 모습을 지닐 수 있게 됐다는 의미의 영리함이다.

 

 

2. 미학적 효과: ()과학적이고 반()예술적인

백정기의 작품에서 문자 그대로가장 실증적인 경우를 꼽으라면 단연 'Is of' 시리즈를 들어야 할 것이다. 이 시리즈는 작업의 최종 결과물이 사진인데, 그 사진들의 이미지가 놀랍게도 그 사진에 찍힌 피사체에서 추출한 색소를 잉크로 써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설악산의 가을 낙엽을 찍은 사진은 설악산의 노랗고 붉고 푸른 낙엽 이파리들을 긁어모아다가 각종 장치를 이용해 갈고 압착하고 추출해낸 안료로 이미지를 프린트했다. 마치 노란 바나나의 우유는 노랗고, 살색 크레파스는 살색으로부터 나온다는 잘못된 인지습관을 모방하면서, 역으로 그것이 오류가 아니라고 증명하는 것 같은 이 기묘하게 논리적인 'Is of' 연작이 가능했던 가장 결정적 계기는 작가의 반복된 실험이었다. 그는 색을 얻기 위해 용매와 분리기를 테스트하고, 식물의 원액을 색채로 인쇄할 수 있도록 프린터 개조는 물론 특정 부품까지 개발했다. 그러므로 'Is of'의 창작에서 과학적인 면모는 정확히 하면 공학, 더 구체적으로는 기계장치를 고안하고 실물로 제작하는 이론과 실행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론과 실행이 결과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영역은 예술, 정확히는 하나의 미술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공학은 반쯤만 과학적이다.

또 다른 작품 '단비'2010년 인사미술공간 전시장 전체를 인공 비가 내리는 특정 장소로 변환시킨 건축공학적 설치미술인데, 여기서 백정기의 반()과학적 방법론은 종합의 면모를 발휘한다. 지하 전시장의 천장에서, 사카린을 섞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단맛이 나는 비가 내리도록 한 이 설치작품은 전시장이 위치한 건물 2층의 수조에서 나온 물이 사카린과 섞이도록 한 중간 장치, 그 단물을 흘려보내는 펌프와 배관, 그리고 배관을 타고 지하로 내려온 물이 천장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도록 만든 버튼과 바닥으로 모인 그 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장치까지 모두 작가가 발명한 시스템을 통해 가능해졌다. 그 하드웨어들 중 어떤 것도 없거나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다면 '단비'는 작품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단비'가 일종의 설치미술이자 관객 참여형 퍼포먼스로서 '단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실의 건축물과 상하수도 구조를 바탕으로 하되, 거기에 크고 작은 변형을 가하는 작가의 아이디어와 행위가 기본적으로 현대미술의 범주에 정착해있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기우제-모로코' 이후 백정기가 자기성찰을 통해 깨달았던 미술의 방향, 즉 은유를 넘어 실제적이고, 예술적 관념이나 미학을 넘어 보다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작업은 공학과 미술 양자를 겹쳐서 보고 개별적인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쪽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옳다.

요컨대 그 미술의 방향은 앞서도 썼듯이 한편으로 반과학적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반()예술적이다. 백정기의 작업이 반예술적인 이유, 즉 아직 고유하고 독립적인 예술이라기보다는 예술에 가까운 것, 혹은 예술로서는 아직 정체가 확고하지 않은 것인 이유는 우선 그의 아이디어와 미적 실천의 방법론이 여전히 현대미술이 이미 정의한 범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세부 내용과 표현된 형상의 부분들은 물론 차이를 갖고 있지만, 백정기 작업의 요소요소, 국면과 국면이 장소 특정적 미술, 참여/개입의 예술, 개념미술, 사회정치적 논평으로서 미술의 그늘 안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앞에서 논한 작업들보다 특히 그 같은 점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역사적 안테나' 프로젝트들이다. 작가가 유럽의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기획하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예를 들어 19세기에 건립된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국경을 잇는 다리(MariaValéria bridge)처럼 국내외 여러 공공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기념비를 단파라디오 주파수를 수신할 수 있는 일종의 안테나로 기능 전환시키는 프로그램이다. 작가는 이를 위해 현장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리서치하고, 그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문맥을 비판적으로 개념화해 개입/참여의 지점을 만들어낸 다음, 기존의 기념비들을 물리적으로나 지적 논리로나 변형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이에 대해 이름을 붙여보자면 장소 특정적-개입을 전제로 한-개념적-설치미술정도가 될 것이다. 그만큼 백정기의 작업에서 현대미술의 유효한 언어들, 우세한 방법론들, 주류의 태도와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물론 이 같은 점이 반드시 백정기의 미술에서 부족하거나 문제적인 부분은 아니다. 또 앞으로 이 작가의 성공과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고도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미술계의 각종 범주화 과정에서, 여러 아트 이벤트의 기획 과정에서 백정기의 미술이 반쯤 다리를 걸치고 있는 현대미술의 다종다양한 얼굴은 매력적인 것으로 빈번히 채택된다. 또 작업의 논리와 결과물로서의 작품이 꽤 명쾌하고 세련된 수준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이해를 자극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백정기의 작업이 과도적 단계들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자기 미술의 형식을 발명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은 백정기 스스로 깨달았던 것처럼 작업적인 제스처를 뛰어넘어 작품 자체만으로 온전한 무엇(반과학적이거나 반미술적인 것 대신 온전한)을 계속 찾는 트랙 위를 여전히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 트랙을 더 잘 달리거나 아예 트랙을 이탈해 다른 길을 찾거나 완전히 다른 수를 낼 수도 있을 텐데, 물론 그 결정과 실행은 작가의 몫이다.

 

 

*조선 태종은 1407(태종 7) 순금사 대호군 김겸의 제안에 따라 용과 비슷한 형상을 한 도마뱀을 제물로 바쳐 하늘에 비를 기원하는 석척기우제(蜥蜴祈雨祭)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푸른 옷의 남자아이 20명이 버들가지를 들고 옹기에 잡아다 넣은 도마뱀에 대고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하며 비를 주룩주룩 오게 하면 너를 놓아 보내겠다.”고 노래하는 제식이었다. 백정기는 이 같은 제례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강수미 (미학,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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