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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영은미술관

출생

1976, 서울

장르

설치

홈페이지

www.jungseu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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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e Your Wish, 2015

자동차, 경광등케이스, 양초, 200 x 160 x 25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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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으로부터의 탈출: 정승의 <기계의 진화 part-1>

우리 인간은 우리가 금붕어와는 닮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신체적으로도, 지적으로도, 그리고 정서적으로도 둘 사이에는 합리적으로 비교할 만한 점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금붕어는 기회가 주어지면 한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먹어버리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겉보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금융기관들이 붕괴되고, 1년째 세계적인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우리 인류도 별 다를 바 없는 소비 문제를 가지고 있었음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한다.

이러한 시기에 적절하게 선보이는 정승의 설치 조각 <기계의 진화 part-1>은 우리의 집단적인 소비기질을 기운이 빠질 정도로 정확하게 잘 묘사한다. 이번 전시의 중요 포인트인 작품 는 두 개의 진공 청소기가 수많은 종이 조각들을 갤러리 바닥에서 동시에 빨아들이고 뱉어내는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소비 편향적 기호는 근대에 와서야 이루어진 진화적 발달이라고 하기에는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이미 수 세기 동안 예술가들에 의해 솜씨 있게 묘사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Peter Bruegel the Elder1567년 작품 은 탐욕의 세계에서 푸짐한 향연을 즐긴 두 명의 대식가들이 어지러진 고기조각, 치즈, 패스트리, 와인 사이에 대자로 뻗어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자태는 마치 죽은 금붕어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소비에 대한 비판은 Tom Otterness의 장난치는 듯 하면서도 파격적인 형상 작품들이나Mark Wagner의 지폐를 사용한 섬세한 꼴라쥬 등을 통해 현대 미술에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승은 다소 과장되어있으나 분명한 인도주의적 방식으로 우리의 끝없는 소비 행태를 모방하는 움직이는 실체를 만들어 예술의 영역에서 이러한 논의를 한 단계 확장시켰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는 주목할 만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예전 작품들은 주로 물건이나 기계를 교묘히 조작하여 인간과 동물의 특성을 주입하는 것이 주를 이뤘다. 2006년 작품인 <진열대>에서 작가는 거대한 진열대를 해체, 윗부분을 촉수처럼 생긴 팔로 변형시켜 갤러리 공간의 구석구석에 극적으로 뻗어나가게 했고, 2008년에 완성한 시리즈의 작품들에서는 자동차, 복사기, 야외용 의자 등과 같은 생명 없는 물체들에 수천 개의 케이블 타이들을 붙여, 물체가 인간의 행위를 모방하다 체포된 듯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러한 생각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났던 작품은 2008, 그의 가장 성공적이면서도 겸손했던 작품인 <진화를 향한 몸부림>이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선풍기가 다른 선풍기를 정서적으로 감싸며 안아주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에서 작가는 처음으로 단순히 기계의 외관과 시각적 특징이 아닌 복잡하게 얽혀있는 내부 조작 자체를 변형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단순히 인간의 외모를 닮은 것을 뛰어넘어 인간의 특정 행동을 흉내내기까지 한다. 몇 사람의 엔지니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인간과 기계의 공통점이 더 분명해졌다는 측면에서 이 작품은 정승의 작가 활동에 야심적인 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금붕어처럼 보인다는 말보다 금붕어같이 행동한다는 말이 더 낫다는 뜻이다.

정승의 모든 작품들에는, 관음, 구속, 물리적 타락과 같은 어두운 요소들과 더불어 참신한 유머감각이 존재한다. 그것은 공적인 예술 세계에서 점잖은 척 하는 사람들에 의해 쉽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을 그러한 성격의 것이다. 역시 체계적으로 조금의 존경도 없이 생명의 파편들을 파멸시키는 인간에 대한 비웃음 속에서 이러한 기발함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단순한 농담이기 보다는 명확한 비난이며,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까지 정승이 유지해온 뚜렷한 문화적 비판의 일환이다.

이러한 비판의 가장 특징적인 측면은 에서 끊임없이 흡수되었다가 배설되는 종이 조각들에 있다. 광택 있는 대중문화 및 패션 잡지들과 신문, 모조 지폐로 이루어진 이 종이들은 현대 사회에서 계속적으로 소비되지만 궁극적으로는 기본적인 생존에 전혀 필요 없는 존재이다. 정승은 이 조각들을 설치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새 것으로 교체하지 않고 왜곡과 변형을 유도하는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물질 대상의 구별되지 않는 본성과 그것들을 소비하고자 하는 우리의 끝없는 욕망의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수억의 인구가 직접 벌지도 않은 돈으로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낭비 행위는 전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야기했지만 그 속도는 최근 1년간 어느 정도 진정된 것처럼 보인다. 시각적 그리고 기술적인 면에서 모두 혁신적인 이 설치 작품에서 정승은 이러한 전환의 순간을 가져오게 된 비합리적 행동의 본성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현재까지 이어진 인간의 존재는 지금으로서는 금붕어와 비교되기를 피하고 있으나, 이번 전시의 제목 <기계의 진화 part-1>(바라건대) 우리의 성숙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일러주고 있다.  

에릭 글리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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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평론

정승에게 한번 끼우면 자르지 않는 이상 뺄 수 없는 케이블타이는 기계 문명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생산력의 향상을 위해 정해진 경로를 따라가는 진보 및 역사주의는 부조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선적 진화론에 내재된 시간의 불가역성은 폭력성을 내포한다. 그의 작품에서 자동차나 복사기 같은 매끈한 기계는 케이블 타이에 뒤덮여 야만적인 모습으로 변모한다. 인간과 함께 진화하는 기계는 인간의 모습을 비추어준다. 기계와 인간은 하나로 연결되어 욕망하는 기계가 된다. 두 대의 선풍기가 아무 이유 없이 붙어서 뒤틀리는 작품에서 작가는 진화를 위한 몸부림을 본다. 기능들로 분화되고 다시 융합되는 과정은 이익을 위한 자본의 진화이다. 그의 초기 작업에서 최첨단 과학기술의 총아인 자동차는 완전히 뜯겨진다. 그 안의 모든 것을 비우고 틀만 남기고 찢어서 벌려 놓은 모습은 괴기스런 거미의 모습이다. 작가는 이 작업을 승인 받기 위해 학교의 수위부터 시장에 이르는 복잡한 절차를 통과해야 했는데, 이러한 경험은 궁극적 목적이 불분명한 채 자기 확대만 반복하는 관료주의의 실체를 발견하게 한다. 수많은 멀티 탭을 이어 붙여 전기기구가 작동하게 만든 작품 <멀티 콤플렉스>(2009)는 구조가 무의미하게 뻗어 나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이미 기능주의를 초과하고 있으며, 시스템 그 자체의 생존만을 위해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바닥에 잔뜩 쌓인 인쇄물을 끊임없이 흡입하고 내뱉는 로봇 청소기에서 작가는 기계의 진화를 본다. 소비와 생산은 쓰레기에서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무한 반복구조와 다를 바 없다. 여기에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내재해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는 불분명하다. 인간자체가 구조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머리와 팔이 잘려진 사람이 탄 자전거 200대가 트랙을 도는 작품 <서클링 콤플렉스>(2010)은 집단으로 정해진 궤도를 돌고 있는 현대인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가 이 장난감을 발견한 것은 지하철에서 어딘가 바삐 가는 도중이었다. 빙글빙글 도는 장난감은 보이지 않는 구조가 강제하는 현대적 삶으로 다가왔다. 원은 반복된 구조를 상징하는 형태로 그의 작품에 종종 나타난다. 최근 작품에서 인형과 결합한 둥근 형광등은 만다라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의 작품에서 현대사회의 구조, 기계적 구조, 종교적 구조, 예술적 구조는 중첩된다. 구조들은 연동되면서 인간의 몸은 물론,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권력을 생산하는 것이다. 2011년에 전시된는 일본에 원본이 있는 중국제 짝퉁 인형2000개를 경기장의 관중처럼 배열했다. 그것들은 주변의 빛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살아있는 듯 흔들거리다가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진다. 스펙터클 사회에서 이러한 추락만이 볼만한 사건이 된다. 정승에게 전형적인 현대인은 클론이며, 일정기간 동안 입력된 행동을 반복하다 우연적으로 사라지는 소모품이다.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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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 Idea of Complex _ 많음과 반복의 수사

사물들 자체는 엄격하게 정지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다. 그것들이 지닌 기능과 역할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축된 의미체계안에서의 정해진 위치와 위상에 따라 식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그것들이 우리가 만들어낸 유기적 의미체계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낯선, 출처를 알 수 없는 대상들이 되기도 한다. 즉 그것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명명(命名)하는 범위 내에서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사물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우리가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산업 생산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량생산을 통해 동일한 양태로 존재하기 시작하는 산업적 사물들은 특정한 기능을 위해 특정한 위치에서 의미를 획득하는 것들이지만, 조금만 그 자리에서 벗어나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물들로 변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정승은 대량으로 만들어진 산업 생산물들을 사용한다. 그것들의 많음과 동일성은 점점 더 사물들을 그것들의 생산방식이나 생산관계로부터 유리된 존재들로 보이게 한다. 오늘날의 산업 생산물이 자아내는 낯섦20세기 초에 뒤샹이 경험했던 준 공예적 산업 생산물들과 또 차원을 달리한다.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대량생산이 생산관계 및 인간과 대상의 관계에 어떻게 변화를 일으켰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노동자가 더 많은 부를 생산할수록, 또 그의 생산이 힘과 범위에서 더욱 증가할수록, 노동자는 더욱 가난하게 된다. 상품을 보다 많이 창조하면 할수록 노동자는 더욱더 값싼 상품이 된다. 사물세계의 가치증식에 인간세계의 가치절하가 정비례한다. (...) 이 사실은 단지 노동이 생산하는 대상 -노동의 생산물-이 하나의 낯선 존재로, 생산자에게서 하나의 독립된 힘으로 노동과 대립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노동의 생산물은 한 대상 속에 응고되고 물화된 노동으로, 이는 노동의 대상화이다. 노동의 실현이 노동의 대상화이다. 정치경제학이 다루는 조건하에서 노동자에게 이러한 노동의 실현은 노동의 탈현실화로, 대상화는 대상의 상실과 대상에 대한 예속으로, 전유는 괴리와 소외로 나타난다.

 

노동이 인간이 대상에 인식가능한 의미를 부여하는 구체적 과정이라면, 노동의 대상화는 그것이 그러한 의미로부터 독립적인 탈현실화의 체제로 편입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설파한 노동의 대상화는 오늘날의 예술에 있어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예술적 의미체계의 탈현실화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존재양태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예술적 순환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예술가와 작품, 혹은 예술가와 관객을 괴리와 소외로 이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예술에 지속적인 흥분과 대규모의 네트워크를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승이 컴플렉스라고 부르는 것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간여하고 있다 : 하나는 많음으로, 그것은 동일한 것들의 반복이자 대상화된 생산의 비극적 운명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반복으로서, 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닌 자기지시, 동어반복을 통한 스스로의 식인(食人)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클링 컴플렉스'는 수많은 목없는 사이클러 인형들의 맹목적이고 순환적인 질주를 일으키는 놀라운 작품이다. 200여개의 자전거들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맴돌다가 갑자기 정지했을 때 느껴지는 충격적인 정적은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극적인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멀티 컴플렉스'는 수십개의 멀티탭들이 마치 수많은 관절로 이어진 다족류처럼 허공에 매달린 작품으로, 끝부분의 붉은색 스위치가 달린 멀티탭들은 마치 발기한 성기의 충혈된 핏줄들처럼 느껴진다. 그것으로부터 플러그로 연결된 작은 선풍기 하나가 마치 죽어가는 작은 동물처럼 머리를 땅바닥으로 향한 채 꿈틀거리는 모습은 그 어떤 연기자가 연기하는 최후의 모습보다도 더 절망적이다.

 

유화 연작인 '하이 볼티지 컴플렉스'는 구체적으로 뇌에 연결된 전기적 자극 혹은 그것이 떠올리는 사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고압의 전류를 필요로 하는 뇌란 마치 자본주의가, 예술의 자율적 순환체계가 그러하듯이 끊임없이 자극과 흥분을 필요로 하는, 탈현실화된 뇌인 것이다. 예술가의 뇌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승은 자신이 다루는 과다한 반복과 자기지시의 수사를 통해 언뜻 그 안에서 정지의 순간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스펙타클을 대상화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것이 정승이 지닌 시적(詩的) 자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스펙타클 자체가 그러한 정지의 순간들을 더욱 효과적이고 강렬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굳이 정승의 작업에 덧붙이자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산업 생산물은 그 자체로서 산업적 생산관계를 결정화하는 대상이다. 그것은 동시에 철저하게 낯선 사물들이다. 그것이 지난 20세기에 레디메이드와 오브제를 예술적 담론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이유이다. 따라서 지나친 시적 감정이입은 자칫 이러한 사물들을 감상(sentimentality)의 장으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 대상을 파악된 사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다. 정승의 작품들은 그 경계에 놓여있다. 대상이 노동을 대상화한 것만큼, 대상을 철저하게 예술로부터 대상화하는 것이 지속적인 문제로 남을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시선 속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항상 과제로 주어진다.

유진상 (계원예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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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파괴의 충동을 지닌 돌연변이 기계

전시장 한켠에서 복사기가 돌아간다. 복사기의 안쪽 부속품들이 쏟아져 나온 상태인데도 작동되고 있으며, 혼자서 불빛을 내며 무엇인가를 끝없이 스캐닝하고 있다. 내장처럼 쏟아져 나온 부속품은 빨강, 파랑, 노랑색이 칠해져 있다. 부수어진 기계는 케이블 타이로 다시 연결되어 있는데, 기계 표면 위로 뻗은 수많은 케이블 타이들은 마치 짐승 가죽위의 털처럼 빽빽이 붙어있다. 그것은 산산조각 나기 일보 직전의 몸체의 외형을 유지하면서 남은 여력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려는 듯하다. 작품 현대인들의 삼원색에 관한 착각은 복사기 안에 세 가지 색상의 잉크가 들어있다는데서 착안한 것이다. 그 삼원색의 조합에 의해 수많은 색이 재현된다. 그것은 극소수로 한정된 코드가 유일한 기준이 되고, 그것들의 조합 및 무한 재생산에 의해 세계의 다양성이 제한되는 상황을 표현한다.

부수어진 기계의 몸체를 잇는 케이블 타이는 손쉽게 조여 주는 역할을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는 절대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딱 한번만 사용될 수 있다. 정승이 다른 작업에서도 많이 활용하곤 했던 케이블 타이는 단순히 재미난 형태를 연출하기 위한 방편이기 보다는, 편리함, 일회성, 조이기, 일방성 등의 성질을 통해 현대 문명이 가지는 본질적 면모를 압축하는 소재이다. 대상과 대상이 이음매도 없이 연결되는 컨버전스convergence’ 시대에 작가는 조각난 대상을 누더기 깁듯이 잇는다. 디지털 부문에서 활용되는 융합 기술을 덩치 큰 아날로그 기기에 적용함으로서, 가시적 효과를 극대화 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끌어 모아 한 평면에 놓고 압축시키는 것은 기술의 바로미터가 되어 새로운 가치(이윤)를 창출하곤 한다. 압축 또는 종합은 종종 과도해져서 부조리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는데, 정승의 누더기 기계들이 상징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 기계들은 각각이 가진 기능과 독특함으로 진가를 발하기 보다는, 맹목적인 융합을 통해 모든 존재가 엇비슷해지는 상황을 만든다. 모든 것을 조금씩 갖추기 위해 많은 물질과 에너지가 집약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 비슷해진 존재들이 동일한 평면에서 무한경쟁을 한다. 이러한 경향은 다양성의 공존과 평화가 아니라, 권태로움과 전쟁을 낳는다. 작품 '흐르는 물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온다]는 샤워기와 변기를 결합시킨 것이다. 하얀 타일이 깔려 있는 변기 아래가 깨져있고, 그 조각들 사이로 쏟아진 물이 고여 있다가 모터에 의해 순환된다. 변기와 샤워기 사이를 순환하는 탁한 물은 씻기와 배설물 처리를 결합시킨다. 그것은 어쩌면 배변과 목욕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는 아이디어 상품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중의 씻어내기라는 행위를 통해 위생에 대한 현대의 강박관념을 표현한 것이며, 한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발상이 극단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껴진 시간과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은 또 다른 소비와 생산의 광란일 뿐이다. 이 기계는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는 순환 주기가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짧아지고 있음을 예시한다. 두 대의 선풍기가 얼굴을 마주대고 작동되는 작품은 융합의 부조리성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작품 제목처럼 진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머리가 붙어있고 몸이 서로 꼬여있는 두 대의 선풍기는 회전 모드로 맞추어져 있어 거슬리는 소음을 내면서 계속 뒤틀린다. 서로 붙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두 개체가 한데 얽혀서 몸부림치는 모습은 어떤 상상속의 괴물 못지않게 섬뜩하다. 복사기, 선풍기, 양변기 등이 활용된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작가가 수년 째 실험하고 있는 돌연변이 기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모두 최초의 대상이 가졌던 기능이 변형된다. 생존을 위한 진화는 생물 뿐 아니라, 기계에도 적용된다. 자연에서도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수많은 실험이 이루어지는데, 거기에서 과도적인 존재들인 돌연변이가 태어난다.

그 중 극소수만이 경쟁력 있는 새로운 종으로 분화한다. 인간의 예술적, 과학적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 역시 자르기와 다시 잇기 라는 기본적인 방식을 가진다. 작가는 개체 뿐 아니라 환경을 대상으로 하여, 공간에 가벽을 만들고 그것을 부러뜨려 다시 잇는다. 통상적으로 융합이나 집중은 생산력의 향상을 위한 것이다. 한 대의 자동차나 컴퓨터가 생산되기 위해 수많은 부품들이 집중되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노동력과 잉여가치()의 집중이기도 하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동기와 행위를 생산력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수렴 시킨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고 같은 것을 욕구하도록 한다. 집중과 융합을 통해 대량 생산하고 이를 대량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욕구의 획일화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구의 획일화는 풍요 속의 빈곤을 생산할 뿐이다.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무분별한 융합에는 자기 파괴적인 충동이 내재해 있다.

분열된 기계를 깁는 행위는 연결 부위의 실밥을 드러내고 틈을 벌리는 행위에 가깝다. 균열을 노출하면서도 그것들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정상적인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승이 사용하는 기계나 기구들은 대개 기능에 충실한 산업 생산물들이다. 선풍기, 변기, 샤워기, 복사기 등의 대상은 아무런 장식도 군더더기도 없이 그것의 목적을 위한 형태들을 가시화한다. 원래의 재료들은 형식은 기능을 따르는기능주의적 사물이며, 기능에 대한 기호를 가진다. 하나의 기능으로의 환원은 그자체가 끊임없는 제거와 융합의 결과물이다. 현실 속에서 기능들끼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더 나은 기능을 위한 것이며, 자본의 조절과 관료적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정승은 케이블 타이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분리된 기호들을 결합시키는데, 이는 산업 현장이나 시장에서 이윤을 위해 늘 상 이루어지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서 기능의 배가를 위한 공장과 시장의 실험들의 부조리한 면모가 극대화 된다. 작가가 고안한 새로운 기계 혹은 기구들은 기능이나 생산의 향상이 아니라, 자기모순과 자기파괴를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하다. 그는 기능주의의 언어를 조금씩 비틀어 기능을 초과하는 몫을 드러낸다. 본래의 기능이 변형되었지만 멈추지 않고 쉭쉭거리며 계속 작동하는 정승의 기계들은 욕망 그 자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기계와 인간을 동시에 연상시키며, 양자는 욕망하는 기계로 수렴된다. 들뢰즈는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한 책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이 작동하면서 끊임없이 고장이 나며 고장을 일으키면서만 작동한다고 말한다. 이때 욕망하는 기계들의 고장은 그 작동 자체의 부분을 이룬다. 욕망은 기계요 기계들의 종합이요, 기계적 배열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기계는 연속체의 힘을 구현하며, 어떤 부품이 다른 부품과 연결된다. 통일성을 향하는 것은 근대적 이성의 특징이기도 했다. 이성은 근대적 계몽의 전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만프레드 프랭크는 현대의 조건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이성은 통일성을 지향하는 힘이다라고 말한 이래, 이성적 판단의 근본 성질은 사고의 필연성, 보편성, 합법칙성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성은 개인적인 열정에 대해 일반의지의 합리성을 대립시키면서, 과학적 논증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 사회적 형식들을 백지화했다. 이성은 보편주의의 근거가 되었으며, 현대성은 이성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의 긍정적 이미지에 의해 완성되어야 했다. 근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포괄하려는 동일성의 사유가 확립된다.

그것이 생산과 소비, 소통(유통) 체계와 맞물리면서 표준화 되었다. 도처에서 합목적성과 효율성이 구가된다. 그러나 진보는 인간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도 부품으로 활용되는 익명의 구조가 유지되고 확대 재생산되는데 필요한 것은 아닌가. 정승의 작품에 나타나는 부조리한 기계들은 인간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이다. 거기에서 합리성은 부족하거나 초과된다. 그것은 근대의 이성이 밟아온 궤적과 같다. 이성은 투명하거나 공평무사한 것이 아니라, 욕망 및 권력과 얽혀 있다. 정승의 작품에서 기계들의 기능은 최초의 투명한 의미와 기능을 잃고 변형된다. 그러나 그 변형에는 뚜렷한 목적이 없다. 그것은 근대예술처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가진다. 그것은 도구화된 이성이 인간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으로 치닫게 해온 자본주의 사회의 숨겨진 비합리성을 드러낸다. 이러한 비합리성에서 해방의 계기를 보는가, 아니면 억압의 계기를 보는가는 관객의 관점에 달려있다.

이선영(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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