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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라, 토탈미술관

출생

1974, 충남 보령 대천

장르

회화, 설치, 미디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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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무게_지난 과거, 2012

미디어 설치, 1min 32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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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기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어본 사람에게 있어 ‘원더’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중의적인 것이다. 그것은 매우 ‘놀랍고 신기한’이라는 의미 말고도 끝없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구조적 틀 혹은 상태를 가리킨다. ‘길을 잃는’ 이유는 거울 속이 이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상대적인 세계의 존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김기라도 역시 지난 30여년 간 길을 잃어 왔다. 그 이유는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그의 작품이 명시적으로 외쳐대는 것처럼 ‘제국’의 영토 안에서 끝없이 주변부로 머물 수밖에 없는 어떤 세계 안에서의 삶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작가 자신이 그 안에서 살아오면서 자신의 내면에 각인시킨 위계의 구조 역시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더 나을 뿐 아니라 그 때문에 불완전한 삶의 국면이나 양상을 항상 감시하고 평가하는 어떤 세계 혹은 관점들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세계, 압도적이고 통제적인 시선에 대해 도전하는 일, 이것은 처음부터 패배가 약속된 일일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드라마가 선택하는 이야기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선 주인공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 근육을 기르고 무기를 들어야 한다. 앨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저쪽으로 넘어가기 위한 작은 서랍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기라의 가족사 역시 이러한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전통적인 유교국가인 한국에서는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아닌 경우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아온 악습이 있다. 8-9세기 이후의 많은 대표적 한국 문학들이 ‘서자’(庶子)라고 부르는 이 소재를 다루고 있을 정도다. ‘서자 콤플렉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진입하는 불가능한 과업 대신 스스로 중심의 복제를 끊임없이 구축한다는데 있다. 사실상 여기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만들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끊임없이 중심을 참조한다는 사실은 그것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서자라는 사실은 단지 가족구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사회의 전반적인 위계구조로 확장, 반영되는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한국에서 김기라가 받은 교육시스템 역시 위계에 있어 상대적인 차별의 대상이었으며, 예술가라는 지위는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대표적인 ‘서자 시스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기라는 사회가 가하는 외적 억압과 내면적으로 구조화된 억압이 일치하는 세계를 살아가면서 역으로 가장 낙천적인 태도를 취해 왔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을 이 세계에 데뷔시킨 부모를 발가벗겨 그들에게 권투를 -더 정확히 말하면 워밍업을- 하게 하기도 하고, 자신보다 더 심한 처지에 있는 이들 -장애인들이나 동물과 같은 소수자들-과 함께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라의 작업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은 2002년에 제작한 <29층>이다. 이 작업은 한국의 전형적인 주거형태인 고층 아파트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서랍’으로 이용해 온 비디오 캠코더를 들고 계단을 통?해 29층 옥상까지 힘겹게 뛰어올라가 난간 너머로 캠코더를 집어 던졌다. 이 퍼포먼스에서는 기록장치가 기록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기록하는 주체의 의식과 정확히 일치되는 지점에서 이미지를 생성하는 독특한 방식을 만들어내었다. 다시 말해 캠코더는 29층으로 헉헉 거리며 뛰어올라가 주저하지 않고 아래로 몸을 날려 자살하는 어떤 이의 시점을 그대로 기록, 재현하고 있다. 심지어 약 7-80m 아래로 추락하면서 본 것, 그리고 최후의 순간까지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어두운 농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가는 과정을 기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작가가 ‘서랍’을 어떻게 사용하는 지의 사례가 되었다. 김기라는 예외 없이 이러한 개별적 경험에서 도출된 담론을 다시 확장적 구조에 적용하는 방식을 보이는데 2004년부터 시작한 <정부_소비자_개인> 연작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 비디오 작품은 2006년에 작고한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에 대한 헌사의 의미가 담겨있다. 백남준이 1961년도에 처음 시작한 <길에 끌리는 바이올린>을 떠올리는 <정부_소비자_개인 : 런던의 바닥>과 <정부_소비자_개인: 베이징의 바닥>에서 작가는 작동 중인 캠코더를 끈에 묶어 바닥에 끌고 다녔다. 여기서도 ‘바닥’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시선의 극단적인 위치와 캠코더의 격렬한 마찰, 퍼포먼스가 함축하는 내재적 의미는 곧 바로 신체적인 경험으로 전환되어 관객에게 전달된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지평과 그 토대 위에 놓인 것들을 ‘고통’이라는 범주 안에서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언제든지 거시적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다.
김기라는 최근에는 특히 작가의 모국인 한국의 사회, 문화적 현상들 속에 흩여져 있는 권력?구조의 기호들을 연결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기호들이란 70년대 한국의 프로파갠더 정치를 연상케 하는 한 묶음의 야외 스피커들과 중산층의 고급문화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는 싸구려 분재와 자기들, 여성 전화교환원들이 기계적으로 내뱉는 ‘사랑합니다’라는 멘트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가치를 소외시키고 삶을 평면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는 다양한 장치들이다. 여기서 감지되는 것은 작가의 시니컬한 태도와 자해적인 욕구는 언제든지 낙천?적 표피를 뚫고 관계들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 (거울의 뒷면과 아무데도 없는 섬의 중간지대)의 강렬한 조명과 함께 흘러?나오는 6-70년대 한국의 잊혀진 대중가요들은 자본주의적 가치의 맹렬한 순환 속에서 갑자기 울려퍼지는, 헨리 제임스를 이용하자면, 숲 속에서 들려오는 호랑이의 포효와 같다. 가치의 위계들은 한편으로는 매혹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히 위협적이다. 그리고 주변부의 문화에서 그것의 내용은 가장 보편적인 기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Killer>는 가장 대중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기호에 내재되어 있는 이 두 가지 운동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현란한 빛깔로 명멸하는 입체의 로고는 치명적인 이름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공격의 주체가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가리킨다. 직접적인 호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기능한다. 하나는 그것을 통해 부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호명을 모든 사람이 듣고 있다는 사실을 지목하는 것이다.
김기라의 작품은 거대한 가치 체계에 맞서 싸우는 다윗의 벌거벗은 몸을 연상시킨다. 약자가 강자와 싸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스스로의 약점을 무기로 바꾸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모 뿐 아니라 그 자신 역시 벌거벗겼다. 2004년 작 around>에서 카메라를 향해 맨 몸으로 구르며 돌진했던 그가 알려준 것은 그에게 남은 최소한의 무기는 그 자신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는 마치 눈덩이가 굴러오듯 관객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것이다. 끝까지 낙천적인 태도를 견지하라. 그것이 김기라가 중심을 향해 외쳐대는, 잘 들리지 않는 고함의 내용이다. 마치 허접한 패스트푸드들을 열심히 그?린 그의 유화의 제목들이 인 것처럼 말이다.

유진상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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