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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진유영, 환기미술관

출생

1946, 개성

장르

회화, 사진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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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유영 개인전_박정은 기획
참여작가
진유영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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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빛이 충만한 진유영의 작품은 차례로 이어지는 세 가지 주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이러한 작업들은 이미지의 투명과 불투명 사이의 여정에서, 더 정확히는 사진과 그래픽 간의 왕복에서 서로 연결된다.

사진(photo) ? 그래픽(graphie) : 투명과 불투명 사이, 진유영의 작품에 나타나는 재료의 순환

유쾌하고 빛이 충만한 진유영의 작품은 차례로 이어지는 세 가지 주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이러한 작업들은 이미지의 투명과 불투명 사이의 여정에서, 더 정확히는 사진(photo)과 그래픽(graphie) 간의 왕복에서 서로 연결된다. 첫 번째 작업은 가장 기초가 되는 분할 작업, 즉, 촬영, 포착과 같은 사진 촬영 작업으로서, 이는 진유영의 대다수 작품의 출발점이며, 모티브를 구성하는 작업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명확하게 분할되는 나뭇가지들이 내는 효과나 장식이 없는 벽에 투영된 창살의 그림자, 정원 바닥에 배치된 기묘한 물체들, 돌 위를 걷거나 아니면 단순히 렌즈 앞에 놓여 있는 발, 수면에 비친 모습들 등등, 무엇이 됐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가려내고 프레임을 정하고 분할한다. 이와 더불어 이러한 작업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효과들(피사체를 파인더의 테두리 안에 배치 또는 제외시키기, 눈속임 등의 효과)도 포함된다. 예를 들면, ‘바닥 높이의 낮은’ 카메라 시각(발 높이의 시각)이나 수직적인 시각(나뭇잎들을 향해 ‘위를 보는’ 시각)과 같이,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 시각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을 갖게 하고, 사진의 시야의 투명함을 살짝 흐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사진(이 경우에는 디지털 사진)을 커다란 사이즈에 맞게 선택된 크기로 확대한다.   그러나, 분할 작업은 이러한 단순한 첫 번째 단계(사진의 ‘촬영’ 단계)에서 그치지 않고 이보다 더 나아간다. 사실상, 이미지의 확대는 그 자체로 분할 작업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분할 작업이 되풀이되고, 증가되면서, ‘사각형’의 형태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두 번째 분할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단지’ 확대만 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일종의 정해진 크기의 판형에 따라 체계적으로 분할된다. 처음의 풍경이 창살을 통과하여 물질적으로 분해되어 동일한 크기의 작은 직사각형들(‘블록’)의 조합으로 변형되며, 이 직사각형들은 항상 확대된 전체 이미지의 전체적인 크기에 비례한다. 이로 인하여 강한 시각적 효과, 즉, ‘모자이크 효과’가 나타난다. 이 모자이크 효과에서는 이미 전체와 부분간, 조각과 총체간, 분해와 재구성간, (그 자체만으로는) 알아보기 힘든 디테일과 (어느 정도) 복원된 일체성간에 인식의 왕복이 이루어진다. 투명과 불투명 사이. 이러한 모자이크 효과의 활용에는 진유영의 상당히 복합적인 전략이 모두 담겨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미지들 각각을 블록으로 분할하는 것은 작가에게 무한한 조합의 가능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합들의 형태는 대단히 가변적이어서, 완전한 전체일 수도 있고(상당히 드묾), 부분적(조각들밖에 남아 있지 않은 옛 모자이크처럼)일 수도 있는데, 주로 후자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극단적인 정도까지 조정이 가능한 공간의 형상에 따라 이루어진다. 이 조합들은 기하학적이거나, 구멍이 나 있거나, 줄지어 정렬되어 있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형태를 띠기도 하며, ‘사다리의 형상’을 띠고 있거나 수직 또는 수평적이기도 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각각의 ‘설치’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본래의 같은 이미지의 다른 ‘버전(version)’을 제공한다. 변주(음악)의 원칙, 이본(異本)의 원칙(문학) 또는 어미 변화(언어)의 원칙. 이는 마치 본래의 원형으로부터 무한하게 재구성할 수 있는 잠재성과 같다.
요컨대, 이러한 분할의 논리는 현장 전시회 때 작품들을 전시하는 작업 자체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는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가끔, 그러나 가능한 한 그렇다) 특히, 작품들을 공관이나, 공공 장소 또는 특별한 장소에서 전시하는 경우에 그러하다. 진유영은 자신이 전시하는 공간에 대해서 주의 깊게 신경을 쓰는데, 작품 배치에 따른 설치 효과 중 그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것은 창문의 형태이다. 그의 모자이크식 풍경은 창문(가끔은 서울에서 열렸던 전시회 당시, 실제 감옥에서 전시되었던 ‘형무소’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가로대’ 또는 ‘창살’이 달린 창문)’처럼’ 벽에 배치된다. 이는 바깥 세상을 향해 있는 열린 통로처럼 바둑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전망이 좋은 방 같다. 이렇듯, 분할-전시는 바닥, 벽, 천장, 기둥, 창문(실제 창문), 빛 등을 고려하고, 축소 및 확대 비율과 비례, 표면과 깊이, 공간적 거리와 근접함을 활용함으로써, 건축과 현장의 장식과 맞물려 효과를 나타낸다. 원한다면 눈속임의 효과를 내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블록화 되어 배치되고, 특히 구조에 대한 작업을 함으로써 자주 ‘착각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진유영의 작품의 두 번째 기본 작업이 있다. 그것은 전이, 전사 그리고 변형을 동반한 촬영 작업이다. 이것은 재료들의 순환 작업이다. ? 작가는 이를 아주 멀리, 아찔할 정도까지 밀고 나간다. 정말로 이것은 작가의 창작 세계의 핵심으로, 나뭇가지를 다룬 작가의 연작(‘회화의 초상-빛송이’라는 예쁜 제목의 작품)가 좋은 예이다. 작품을 만드는 작업 과정은, 우선, 우리가 이미 본 것처럼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이미지를 사각형의 블록으로 잘라낸 후에 포토샵 처리를 한다. 포토샵 작업을 하면 이미지가 특히 선명하고 환해진다. (하늘의 파란색이 노출 과다로 찍은 것처럼 환한 흰색이 된다.) 이러한 첫 번째 편집은 평범한 보통의 종이에 컬러로 출력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 디지털 인쇄물이 ≪ 그림 전사 ≫ 작업의 대상이 된다.  이때, 작가는 붓과 수채화 잉크(세가지 기본 색상이 여러 가지로 혼합)를 가지고 나뭇잎과 나뭇잎의 무한히 변화하는 다양한 초록 빛깔의 모티브를 다시 불러온다. 색채, 초록 빛깔들의 발광(發光), 수채화 특유의 투명함, 점들과 터치들의 중첩 등, 이 모든 효과들(이것은 사진의 흐릿함이 아니라 ‘투명한 수채화 점묘법(tachisme aquarescent)’이다)은 화려하고 눈부신 팔레트에서 결합된다. 건조가 끝난 후, 채색된 표면을 다시 한번 스캔하고, 이 스캔한 디지털 이미지를 더 두꺼운 무광택지에 다시 출력한 후, 캔버스에 배접하여 작품이 완성된다. 이것은 과연 디지털 인쇄물인가? 회화인가? 아니면 사진 혹은 그래픽인가? 그것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변화한다. 즉, 미끄러지듯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서로 중첩 되고, 재주입 된다. 예를 들면, 이와 같은 과정이 ‘형무소’의 이미지에서도 진행된다. 단지, 거기서는 수채화 잉크는 상관이 없고 크레용으로 그린 선들, 즉, 세 가지 색상(진홍색, 청록색, 노란색) 의 크레용으로 선을 그리는 소규모의 그래픽 작업을 하게 되며, - 이는 세부 묘사, 모자이크의 따로 떨어진 블록을 가까이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아주 잘 볼 수 있다 - 디지털 사진과 선으로 표시된 그림 사이의 여정 혹은 이행이 여러 번 반복된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크레용으로 터치를 하고 인쇄를 한 후, 이 인쇄물들을 다시 스캔하고 재인쇄한 후에 다시 크레용으로 작업을 하고, 또 다시 스캔을 하고 …… 이러한 작업들이, 서로 주고 받는 일종의 교환의 나선 속에서, 서로 다른 재료들 간의 전사의 수많은 순환 속에서 반복된다. 사진과 그래픽 사이의 왕복, 디지털 이미지와 손으로 그린 이미지 사이의 왕복,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왕복이 현기증이 날 정도까지 반복된다. 처음의 분리 작업(분할, 배분)에 재반복 작업(중첩, 증가)이 추가된다. 모자이크 후에는 팔렝프세스트(palimpseste (씌어 있던 글자를 지우고 다시 글자를 써넣는 양피지))로 변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유영의 작업 방식의 핵심이면서, 앞서 언급한 작업의 직접적인 연장 선상에 있는 세 번째 작업은 바로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방식의 작업으로, 재료의 불투명성에 집중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조형적인 작업이다. 이 작업은 사진 작업일 수도 있고, 그래픽 또는 회화 작업일 수도 있다. ? 이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또한, 이 작업은 조각 또는 영화 작업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예가 있다. ‘편도’는 사진-그래픽을 사용하여 벽을 이용한 부분과 ‘조각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집합체이다.  벽을 이용한 부분은, 앞에서 기술한 원칙(사진으로 시작해서 분해-사각형 블록으로 재구성, 디지털 출력, 수채화 작업, 등등)대로 엄청난 확대 비율(초대형)로 제작한다. 그리고, ‘조각적인’ 부분은, 마치 일종의 납으로 만든 뱀(또는 마포(麻布) 조각)처럼, 절단된 끝부분이 수채화로 채색(엷은 푸른 빛)된, 스프링 수첩에서 뜯어낸 종이로 되어 있는 ‘나선 모양’의 기묘한 물체의 모습으로 바닥에 배치된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여러 조각들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여기서 눈속임 효과가 발휘된다. 멀리서 보면, 이 물체는 주름이 잡히고, 대단히 무겁고, 단단하고, 묵직한 납으로 만든 파이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면, 특히, 일단 손으로 만져 보면, 대단히 가볍고, 아주 부드럽고, 평범한 직물로 되어 있으며, 채색(납 색깔)을 하고, 주름을 잡고, 바느질로 꿰매고, 가벼운 소재의 속을 넣어 내부를 채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물체를 잘 관찰하면, 벽에 걸린 사진-그래픽에 등장하는 엄청난 비율로 확대된 수수께끼 같은 것이 바로 이 나선형 물체를 바닥에서 카메라로 근접 촬영하여 그래픽의 점묘화 기법과 환한 색조의 투영된 모습에 모두 수채화 터치를 더하여 시각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조형적인 규모를 가진 이 물체는 재료와 전사, 그리고 전이의 순환 속에서 사진과 그래픽 사이를 교묘하게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진유영의 작품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또 다른, 그리고 마지막 예는 ‘0을 경유하여’ 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이 작품도 역시 이중적인 작품이며, 작업 과정에 영화적 차원을 도입한다. 벽에는 정사각형의 하얀색 작은 틀들이 유리 액자에 넣어서 정렬되어 있는데, 그 틀 중앙은 원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수는 모두 약 50개 정도이다. 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돌출된 부분과 색깔을 통해서 각각의 사각형이, 사실은, 주름이 잡힌 하얀 천에 꿰매 놓은 CD이고 그 천이 CD를 수의처럼 완전하게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순백의 천 위에 강렬한 색채의 작은 점들 찍혀 있는데 그 수가 점진적으로 늘어난다. 첫 번째 칸에는 한 개, 두 번째 칸에는 두 개, 세 번째 칸에는 세 개, 이런 식으로 아홉 개까지 늘어나다가 열 번째에서는 0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열 한 번째 칸에는 점 한 개, 등등). 이렇게 정렬된 것들이 끝이 나고, 우리가 따라 걸어온 벽과 직각을 이루는 벽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최후의 이미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벽을 따라서 열을 지어 배열되어 있는, 우리가 막 보면서 지나온 일련의 채색된 점들을 영상 촬영(연속적으로 움직이는 화면)하여 만든 동영상을 보여주는 비디오 상영이다. 이것은 하얀색 사각형 블록의 분할에 공간적으로 배분되고, 이제는 동영상에 의해서 시간적으로 재구성되는 채색된 점들(1, 2, 3, 등등)을 정돈되고 리드미컬한 동영상으로 영상화한 것이다. 영상은 소리가 나고(흰색 화면에 묻혀 있는 CD들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박동의 리듬, 일종의 고동소리를 재현한다. 우리는 사진-그래픽에서 영화- 조형물(소리가 나는)로 이행했다. 진유영의 왕복, 전이와 전사, 재료의 점진적 변화와 이행은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커다란 기쁨을 가득 안고서.

필립 뒤부아 (예술 평론가, 파리 3대학 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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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사이

진유영은 서울 미대 졸업 후 69년 도불, 마르세이유 보자르를 거쳐 오랜 프랑스 체류 기간동안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국내에서도 이미 확고한 위치를 누리고 있는 진유영은 원래 회화에서 출발했으나, 몇 년간의 근작에서 알 수 있듯이 회화와 사진과의 매체적 관계에 주목함을 엿볼 수 있다. 이는 결국 “본다” 라는 시각성에 대한 인간적/기계적 지각에 대한 여러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뜻에서 이번 전시의 주제 또한 “이미지 사이”(entre Image)매체간 “사이”(entre supports) 개념에 중점을 두었다. 사실 이러한 “사이” 개념은 이미 이전의 작업 과정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이는 먼저 사진을 찍고 프린트 한 후, 다시 잉크나 수채화 등의 물감을 사용하여 수작업을 하고, 이를 다시 기계화 과정으로 이미지를 뽑아내는 여러 번의 혼합 과정을 통해 남게되는 최종 작업은 마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아이러니를 연출하게 된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와 리얼리티를 오가는 눈 속임(trompe-l’oeil)기법으로서의 작품 결과는 아예 사진과 회화라는 매체의 뒤섞임에서 오는 애매모호함(ambiguite)으로서의 매체적 정체성이라는 무딘 의미(obtus)의  또 다른 의미라는 바르트적 용어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진유영의 작품 세계는 이러한 매체간 실험 뿐 아니라 완결된 의미로서의 예술 작품이 아닌, “장소 특수성 예술”(Site-Specific art)로서의 개념을 보여준다. 이 개념은 원래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주로 포스트 미니멀과 대지 미술 군에 속하는 작가들, 예컨데 조각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평가받는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의 과정(processus)으로서의 예술, 리챠드 세라(Richard Serra)의 장소에 따른 환경 조형물, 그리고 비디오 아트에서의 장소 특수성을 최근 모마(MOMA)의 외부 설치 작업을 통해 보여준 더그 앳켄(Doug Aitken)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작품 또한 끊임없이 변형, 생성이 가능한,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기능할 수 있다는 증식과 소멸로서의 엔트로피적 개념을 함측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유영의 작품에서 이러한 변형 가능성으로서의 독특함은 특히 화면 자체를 아예 처음부터 잘게 나누어 파편화(fragmentation)된 표면이 마치 최하위 원소처럼 블록화된 증축 가능성으로서의 질료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배치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전체적 형상은-매번의 전시-이미 주어진 공간조차 그 작품의 일부로서 기능한다는 매우 독특한 관계를 끌어낸다. 이러한 ≪ 장소 특수성 ≫이라는 ≪ 원-흔적 ≫(pre-trace)으로서 이미 주어진 장소가 함축하고 있는 장소성 또한 특정 장소의 역사성이라는 시공간적 지층의 켜(layer)를 비껴 갈 수 없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장소 특수성으로서의 예술 작품은 매번 그 작품 자체의 파괴를 통해서야 비로서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자기 파괴적 파라독스를 이미 함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어쩌면 서구 모더니즘 예슬의 자각에서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순간성(instantaneite)과 덧없음(ephemere)으로서의 보들레르적 메아리가 현대 미술에서 다시 한번 옷을 갈아 입은 채, 고위 노마드적 고스트라는 화장을 하고, 장소 특수적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돌아온 예술 본연의 자리, 즉 예슬이 결국 삶의 또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는 자각과 그 반영으로서의 순간과 장소라는 시공간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현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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