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남: 되살아난 전통의 끝나지 않는 여정(旅程)
이향준(전남대 BK21사업단 전임연구원)
시뮬라크르의 진리성 - 이이남 작품론
칸트는 관객의 예술작품 감상이 관조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작품을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객관적 감성 체험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 작품은 체험이라는 경험적 과정을 통해 작품과 상호작용적인 상황에서 지각된다. 미디어 아트의 이런 상호작용 과정에는 인식의 작용과 더불어 실천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신체적인 개입이 전제된다. 작품을 하나의 현실처럼, 우리의 삶과 같은 강도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이남의 작품은 직접적으로 참여를 언급하는 작품이 아니다. 차용에 의한 가상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을 보여주지만, 미술 일반에서 볼 때 관조적인 범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기억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사실들과 이미지적인 회상의 문제가 작품의 근본적 상황을 관통하고 있다. 이미지 자체가 과정으로서 하나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표현이 요구하는 텍스트적인 논리성에서 벗어나지도 않기 때문이다(그의 작품은 원작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그러므로 이해의 지평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주제가 중요한 토픽으로 전제된다. 즉 일련의 행위들이 현상적인 이미지를 과정적으로 구성하는 것이기 보다 주제에 의해 변주되는 이미지들의 은유적인 상황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를 이야기할 때 이미지의 은유는 2차적인 문제다. 은유적인 상황은 모더니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이남에게 이미지가 시각적인 특성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점은 모더니즘적 회상의 양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요구하는 경험의 원리적 환원이라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이이남의 작품은 기존의 현상들에 대한 단순한 가공과 병치를 통해 성취되는 의미론적 총체성의 해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패러디의 특성을 띤다.
이이남의 작품에서 이미지 차원의 내러티브는, 텍스트적 구조를 전제하고 있는 확장적 성격 때문에 그 확장성이 요구하는 개입의 차원이 분명 관객의 경험적인 체험(전통매체 미술)과 참여(미디어 아트)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의 차이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본다면 뉴미디어는 존재의 성격을 사이버 스페이스와 같은 가상현실적인 공간에서 시간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작품들은 존재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텍스트의 구조적인 결합적 마디들에서 의미 있는 결정적 순간을 찾으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공간적 미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를 달리 볼 수 있는 차원이 형성되고, 관객의 존재가 작품의 내적인 상황에 개입하는가 혹은 외적인 주체로서 존재하는가가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를 구분해주는 중요한 경계이다.
21세기에 뉴미디어는 새로운 정신의 상징적 지표가 되었다. 사회문화적 상황은 물론 그 상황들이 변화하는 지평에서 미디어의 기능에 대한 이해 ― 예술적 정체성의 이해를 통한 인간 이해의 폭에 대한 ― 소통적인 이해가 뉴미디어 아트 시대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정착돼가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적인 내러티브의 구조에서 이미지적인 내러티브 구조로의 변화가 수반되어왔는데, 두 가지 내러티브 형식이 추구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의미의 개념적 제시가 관객의 감성적 방향성을 고려하는 쌍방향적인 소통 상황이 전제가 되는 능동적 감상의 차원으로 변화되어 간다. 이것은 문자 시대의 일방적 수용성의 단계를 뛰어넘는 이미지 시대의 상호작용적인 감성적 소통의 차원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이이남의 미디어 작품에서 시공간의 개념은 가상적인 상황으로 개방되고, 상상력이 개입해 존재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런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미디어적인 개방성이다(이것은 시대적 개방성일 수도 있고 미학적 개방성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같은 조선시대의 회화 작품들에 움직임을 집어넣어 동영상이미지로 변화시킨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인 <강희안-신고사관수도, 2009>와 <겸재 정선-인왕제색도, 2009>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확장시켜준다는 의미보다 기존 작품에 대한 재해석의 차원으로서 동영상 이미지의 가능성이 가질 수 있는 개방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가상적인 의미부여 가능성에 대한 단서로서의 작품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작가의 인식과 관객 지각의 균형 속에 예술 작품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강희안과 정선의 작품들이 이이남에 의해 재해석되어 움직임이 부여된 작품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원작과 이이남 작품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우열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이이남의 동영상 작품들이 재현의 문제에서 어떤 진보적인 확장을 보여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즉 가능성의 문제로 재현적 이미지들의 진보성이 어느 정도 개진된다고 막연히 생각할 수는 있다. 이이남의 작품은 영화적인 재현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가치를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분명히 작품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이남의 작품은 시간을 표현의 도구로 강력히 활용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미지적이라기보다는 텍스트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에게 이미지는 마치 영화적인 재현처럼 어떤 스토리를 구성하는 내러티브처럼 보인다. 이는 그가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는 예전 작품들의 관조적 특성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대상을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독해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작품들은 다양한 관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소수 지식인 서클 안에서 서로 지성을 교류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움직임이 부여되었다는 면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어떤 단서가 존재한다. 즉 감각이 반응하는 상황을 작품의 주된 구조로 제시했다는 면에서 양반 계급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미술을 일반 평민들의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좀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민속예술의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영화의 기원을 민속예술folk art로부터 찾는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사물에 생기를 부여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고 그런 열망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적절하게 반영될 수 있었다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이남의 작품은 바로 그런 계기들을 기존의 이미지들에 반영한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지적인 해석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작품들 안으로 우리의 감각이 침투할 수 있은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물론 감각은 작품을 해석하는 미학적인 틀이 아니었고, 철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감각의 활용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움직임은 반응의 측면에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움직임은 어떤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활동을 모방한다는 면에서 미디어 아트의 미학적 태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와 인상은 움직임이 생명을 지닌 신체의 활동을 모방한다는 면에서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를 사라지게 해주는 적절한 정신적, 물리적 장치로 작용한다. 이는 작품이 경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친근한 속성을 공유하는 어떤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예술 형식에서는 전통매체작품(회화와 조각)의 일회적이고 권위적인 아우라로 부터 벗어나 삶의 상황들과 작품의 소통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탈신비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논의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이고, 21세기 미디어 아트 예술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론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용과 움직임이라는 면을 제외하면 이이남의 작품은 많은 면에서 모더니즘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전통매체 작품 제작의 접근 방식과 논리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예술적 태도의 문제가 중요한 미학적 질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원작과 원작을 활용한 작품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해봐야만 한다. 원작은 예술작품으로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들이고, 이이남의 작품은 차용한 원작에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움직임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움직임을 부여하는 과정과 거기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의 또 다른 차원의 조합이 예술적인 상황에서 벗어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동일성만 가지고 차이를 불식시키기에는 어떤 문제적 상황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한 의미의 차용이 일종의 거짓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혹은 기껏해야 하나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의 설명적 동일성이 작품의 원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패러디하고 차용한 싱글채널 작품인 <클림트-신키스, 2009>는 이미지의 움직임이 형상의 변화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이미지를 통해 변화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재현적 형상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즉 오브제적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상태를 지향하는 미디어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화와 미디어의 차이를 지각과 감각의 차이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텍스트적인 내러티브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내러티브가 감각과 맺는 순수성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미지의 추상성이 촉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어떻게 의미를 내포할 수 있고, 또 그런 의미들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내재화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객은 클림트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이미지가 의미의 변화 없이 감각적 통일성을 제시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것은 예술 작품이 어떤 상황으로 제시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차용이 일종의 거짓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차용이 가지고 있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정신성에 대한 반응이었고, 그런 반응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요소들로서 작용하는 시대에 관한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차용으로 구성된 이이남의 작품이 21세기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미디어적 반응과 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역할과 특성이 우리 인간의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들과 긴밀한 관계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서 어떤 미학적 질문의 형식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이 시대의 철학적 질문으로서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껏해야 하나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차용과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미시적인 근본적 속성들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차용이라는 것은 단지 형태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대적, 환경적인 맥락에 원본을 존재시킴으로서 형상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양태들을 의미론적 과정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생산되는 패러디적인 상황은 자연스럽게 원본의 가치가 아니라 삶의 가치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감각적 현실에 충실한 상황은 진실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즉 내러티브는 사실과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진리성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원본과 복제의 예술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음 시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보들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성이 원본의 생산성을 넘어서 있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면에서 원본의 생산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사회에서 감각은 또 다른 존재의 명칭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성격을 규정하는 차원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평 자체에 대한 가상현실적인 상황을 삶과 현실의 지표로 설정한다. 이런 면에서 이이남의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예술적 상황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는 것으로 오브제가 더 이상 작품의 존재론적 중심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린버그가 강조했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회화적 한계를 통해 존재의 특성을 쟁취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미디어 아트 작품의 비물질적인 본질 때문에 물리적인 한계는 존재하지 않고 그동안 미학적 철학적 이해의 지평에서 철저히 외면당해왔던 감각을 존재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이남의 작품은 감각이 어떻게 새로운 예술적 상황을 전개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시뮬라크르 시대의 예술적 속성을 보여주는지 모델이 될 수 있다.
정용도(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