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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 무등현대미술관

출생

1969, 서울

장르

미디어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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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폭 병풍 Ⅲ, 2011

HD 비디오, LED TV, 혼합재료, 4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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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 되살아난 전통의 끝나지 않는 여정(旅程)

1.
무심히 주변을 지나치다가 어디서 본 듯한 동양화 앞에 멈춰 선다. 잠시 후, 그림에서 멈춰 있던 나비와 벌이 움직이고, 꽃잎은 바람에 나부끼며, 물고기는 뛰어놀기 시작한다.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살짝 놀란 채로 뒤로 물러서고 보니, 이 움직이는 동양화가 담겨 있는  화폭의 새로운 성격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은 평면 디스플레이 안에서 움직인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이 전시된 벽면의 아래쪽 한 구석에는 제목과 사이즈, 그리고 이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이이남의 이름과 작품들은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 처음 들어온다. 

2.
그의 작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디스플레이는 종이」라는 개념적 은유(conceptual metaphor)다. 이것은 전자매체인 평판 디스플레이와 그림의 배경이 되는 종이라는 매체를 우리의 머릿속에 강하게 결합시킨다. 이 결합은 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즉각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의식적 사고를 할 필요조차 없다. 일단 그의 작품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디스플레이의 역할이 동양 고전 회화에서 화선지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오히려 사람들이 간과하고 지나치는 것은 이이남의 작품이 이 개념적 은유를 구체화시키기 전에는 자신의 머릿속에 그와 같은 생각이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지각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갖는 동적인 성격이다. 원래의 그림은 종이 위에 그려져 고정적일 뿐만 아니라 분할 불가능한 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디지털 시스템에 의해 재처리된 것이다. 정보를 기본적인 단위로 분할할 수 있는 디지털의 특성상 불연속성은 재조정 과정을 통해 복제와 변형을 가능하게 만든다. 정지했던 새의 이미지는 공간을 이동해서 불연속적으로 배치되지만, 그것은 프레임의 연결을 통해 우리의 시각에 동적인 속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원래의 정보 속에 전혀 다른 맥락으로부터 기인하는 정보를 삽입할 수도 있다. 동양화의 한 복판을 위 아래로 가로질러 날아가는 비행기의 이미지가 삽입될 수 있는 것도, 기하학적인 선들이 횡단할 수 있는 것도, 심지어 동양화의 이미지 속에 전혀 문화적 맥락이 다른 인물과 동작들이 병치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매체가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이미지는 문화적 차이를 갖지만, 정보는 등질적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디지털 시각 매체를 다루는 창작자의 표현의 한계는 사실상 그의 상상력의 한계인 것이다.  
이처럼 개념적 은유를 통한 혼성과 디지털은 굉장한 근친성을 갖는다. 디지털은 혼성을 시각적으로 구체화시키기에 편리하고, 혼성은 디지털에 의해 거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보장받는다. 남는 것은 무엇과 무엇의 혼성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다시 말해, 동양의 고전 회화 전통은 어떻게 해서 이이남의 작품 속에서 새로운 예술소(藝術素)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는가? 

3.
디스플레이가 종이라면 「TV 는 액자」이고, 「영상은 그림」이다. 이러한 연관된 개념적 은유가 사람들에게 손쉽게 받아들여지는 인지적 이유가 있다. 영상 자체는 정지 이미지의 연속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림은 하나의 정지 이미지이다. 따라서 영상은 그 자체로 정지 이미지의 축적이다. 이런 유사성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영상은 그림」은유도 사람들의 두뇌에서 활성화되는 데는 인지적 어려움이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이남의 작품에 두 가지 서로 다른 효과를 가져 온다. 하나는 강력한 보편성이다. 동양의 회화 전통에 약간이라도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이남의 작품이 그것의 현대적 재현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다. 이이남의 작품이 여타의 아방가르드적인 미디어아트와 달리 난해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익숙한 것의 차용(借用) 혹은 혼성 때문이다. 
이 혼성은 이이남의 작품에 두 가지 대비되는 속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게슈탈트적인 두 가지가 충돌하면서 공존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동양 회화의 시각적 재현은 그의 작품에 일종의 원전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차용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원전(original)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 작품의 원전 속에 담긴 것이 똑같이 이이남의 작품 속에도 담겼을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즉, 감상자는 일차적으로 이미지에 집중하게 되고, 이렇게 할 때 그는 아주 오래되고 권위 있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익숙한 어떤 문화적 전통과 대면하고 있다고 여긴다. 누구든지 아주 오래된 전통이 현대적 양식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그의 작업은 방식의 새로움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내용의 핵심적 함축이 알려진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그 매체적 특징은 배후로 소실되고 나타나지 않는다. 디스플레이 자체의 매체적 특징이 지각되는 것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볼 경우다. 이미지는 낡은 것이지만, 그것을 담고 있는 그릇은 새 것이다. 부분적으로 낡고 부분적으로 새로운 것, 낡은 내용의 새로운 형식을 통한 재현. 우리가 르네상스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이러한 양식의 서구적 표현이라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양적인 표제어다. 즉, 이이남의 작품은 아주 낡았으면서도 새롭다.
그렇다고 그의 작업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혼성은 이미 고전적인 사례들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 건축에서 차경(借景)의 원리나, 시가 문학에서 차운(借韻)의 전통이 여기에 해당한다. 더욱 극적인 사례로는 저명한 시구들을 선(禪)의 실존적 상황에 대한 비유로 차용하는 경우도 거론할 수 있다. 차경의 경우는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미 존재하는 자연의 광경을 보고 즐기는 풍경이라는 차원으로 의미를 전이시킨다. 차운은 이미 존재하는 시구의 운자(韻字)에 해당하는 특정 부분을 빌려 자신의 시어 속에 녹여냄으로써 형식의 반복과 내용의 차이를 즐기는 이중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선종의 선사들은 당대의 저명한 시구들을 곧잘 선의 경지에 대한 묘사로 애용하곤 했다. 
예를 들어 법연(法演)이 인용한 것으로 알려진 통속적인 연애시 가운데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소옥아! 소옥아!” 불러도 시킬 일은 없지만   頻呼小玉元無事
다만 사랑하는 낭군에게 목소리 듣게 하려고 祗要檀郞認識聲

이 구절은 남편을 직접 부르지 못하고, 일도 없으면서 몸종인 ‘소옥’의 이름을 부르는 부인의 수줍은 애정을 노래한 것이다. 문학적 독창성은 부인이 직접적으로 남편을 부르지 않고,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종의 이름을 부른다는 간접화법에 담겨있다. 선종의 선사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선적인 깨달음의 속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수행자는 그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도 그것의 이름을 모른다. 다른 이름을 부르지만 그것마저도 그것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다. 소옥을 부르는 부인이 수동적으로 남편의 응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선의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을 다하고도 깨달음의 순간이 자기에게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개념적 은유를 빌려 말하자면 「선의 수행은 사랑」이고, 「깨달음이란 사랑하는 이의 돌아봄」인 것이다. 
차경과 차운, 연애시에 대한 선종의 재해석은 모두 다 동일한 것을 공유한다. 아날로그적인 연속성을 갖는 자연은 창문이란 프레임을 통해 재해석되고, 동일한 운은 다른 시정(詩情)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론적 맥락을 획득하며, 연애시는 선의 깨달음이 가지는 수동성에 대한 은유가 된다. 하나의 대상이 다른 맥락에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이처럼 다양할 뿐만 아니라, 보편적이다. 이이남은 그것을 평판 디스플레이라는 매체를 통해 동양 회화 전통을 차용해서 구체화시키고 있을 뿐이다.    

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의 특성은 양날의 칼로 작용한다. 이이남의 혼성은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이해하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같은 이유 때문에 모방하기도 쉽다. 동양 회화의 전통은 그 자체로 풍부한 텍스트를 제공한다. 하지만, 동양에는 이외에도 차용 가능성이 풍부한 수많은 다른 전통들이 존재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구양순(歐陽詢)와 안진경(顔眞卿) 왕희지(王羲之)로 대표되는 서예 전통은 어떤가? 우리는 동양의 문화에서 서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적인 장르일 뿐만 아니라, 회화와 서예가 얼마나의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다. 이제 추사(秋史)의 「부작란(不作蘭)」을 이이남과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려는 임의의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그의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이남의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부작란」에 포함된 많은 구절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배경과 글자의 색깔이 수시로 변한다. 난의 이미지는 여전히 이이남의 것과 유사하게 흔들거릴 것이다. 그의 작품은 ‘난초를 안 그린지 스무 해, 우연히 참된 성품 그려내었네[不作蘭花二十年 偶然寫出性中天]’와 같은 문자의 변화를 제외하면 이이남의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상상의 예술가는 자신이 이이남이 주목하지 못한 부분에 주목했다고 할 것이다. 동양의 서예 전통을 자신의 미디어아트를 통해 새롭게 해석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이남이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이남의 기존 작품에서는 이러한 타이포그라피에 대한 주목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즉, 이이남은 시각적 이미지의 중요한 오브제로 서예의 가능성에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디 서예뿐이겠는가? 불교의 수많은 시각적 만다라와 탱화 전통, 도가 사상의 수많은 신화적 이미지들 역시 이이남과 유사한 작업에서 중요한 혼성의 오브제들이다.  
따라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워홀(A. Warhol)과 리히텐슈타인(R. Lichtenstein)의 일화를 통해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다. 즉, 워홀은 만화를 소재로 삼으려고 했던 자신의 팝아트에 대한 구상을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을 보고 난 후 철회했다. 그리고 그는 브릴로 상자를 쌓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화와 브릴로 상자의 차이는 워홀과 리히텐슈타인의 차이를 만들었다. 익숙한 혼성의 결과도 이와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선 그것은 진부한 것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을뿐더러, 남들도 나와 비슷하지만 차별화되는 양상으로 진척시킬 수가 있다. 키취를 받아들였던 팝 아티스트에게 이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방가르드를 주장하려는 아티스트라면 이것은 큰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그의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이남에게 근본적인 질문 한 가지를 환기시킨다. 즉, 그는 어떤 종류의 예술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인가? 

5.
이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이이남이 다루는 매체 자체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다루는 매체는 평면 디스플레이인데, 그것의 상투적인 이름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상품 가운데 하나인 TV다. 이것은 곧 이이남의 개념적 통합 작업이 대중매체로서의 TV와 동양 전통 회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화폭으로서의 TV가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어 있는 대중매체이자 기성품이라는 점이다. 그가 이 매체를 택함으로써 마주치는 것은 약간 이상한 상황이다. 매체 혹은 화선지로서의 TV는 이미 거의 모든 가정에 구비되어 있다. 그런데, 그 TV들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예술의 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만연한 화폭과 부재하는 내용이라는 이러한 특징은 TV가 엄연히 하나의 대량생산 제품이라는 상업적 성격과 결부될 때 보다 첨예한 갈등을 드러낸다. 
비록 리히텐슈타인이 싸구려 만화를 자신의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고는 하지만, 박영욱은 그의 작업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만화에서 뽑은 장면을 스케치하고, 그것을 실물 투영기로 확대해 캔버스에 전사시킨다. 그다음 이렇게 확대된 이미지를 스텐실, 채색, 윤곽선 등을 사용하여 캔버스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리히텐슈타인은 소재를 만화에서 따왔을 뿐, 그의 작업은 대량생산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이남의 작업은 전자적 작업과 수작업의 혼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리히텐슈타인과 비슷하다.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의 매체가 캔버스가 아니라, TV라는 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내포한다. 즉, 하나 밖에 없는 TV를 만들어 기성품을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킬 것인가? 아니면 모든 TV에 적용가능한 보편적 예술 형식을 확립할 것인가? 전자에 기울면 아방가르드적이 된다. 반면에 후자에 기울면 팩토리를 운영했던 워홀의 확장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팝 아티스트들을 여전히 동요시키고 있는 아티스트와 비즈니스맨이라는 이중적 정체성은 이이남의 작업에서 여전히 문제될 소지가 있다.

6.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이남의 이번 전시가 가지는 다양성이 어디에서 유래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개념적 통합은 평판 디스플레이와 동양 회화 전통의 혼성이라는 차원을 방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 진행되는 수많은 종류의 혼성을 권장한다. 니체(F. Nietzsche)는 이와 유사한 통찰을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는 반인반수의 켄타우로스이며 머리에는 천사의 날개까지 달고 있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이남은 동양의 저명한 회화 전통이라는 천사의 날개와 평판 디스플레이라는 사람의 몸통을 결합하고 있다. 니체는 여기에 아직도 혼성되어야 할 것이 하나 더 남아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혼성은 네 발 짐승의 하체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제안한다. 실제로 이이남이 이 혼성의 경계를 더욱 확장시키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수의 작품들이 있다.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의 이름이 대변하는 예술 세계는 동양 회화 전통의 원래 외양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는 것들에 단단히 묶여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상승하는 날개로 은유되는 동양의 회화 전통과 같은 아름다움의 세계가 아니라, 땅에 얽매인 짐승의 네 발과 같은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마저도 자신의 혼성 대상으로 포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추함이 아직 그의 혼성 목록에 올라있지 않다면 그는 매체의 새로움과 작업 방식의 현대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직도 추함의 수용에서 머뭇거리는 근대와 현대의 경계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이이남의 기존 작업으로부터 예상 가능한 혼성 작업을 상상하면 새로운 가능성에의 탐색을 몇 가지로 구체화 할 수 있다. 동양 회화 전통은 일종의 리얼리즘에 해당하는 형사론(形似論)과 표현주의에 해당하는 전신론(傳神論)의 이항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혁(謝赫)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운생동(氣韻生動)은 전신론에, 응물상형(應物象形)은 형사론의 표어에 해당할 것이다. 이이남의 기존 작업이 이 가운데 하나를 극단적으로 주장한다면 어떻게 될까? 전신론에 대응하는 동양화의 가장 고도화된 형태로서  득의망상(得意忘象)의 경지를 염두에 둔 숭고화의 길을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재발견했던 생명의 숨결(souffles vitaux)―들뢰즈(G. Deleuze)가 차용하는 이 개념은 놀랍게도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표현 속에 나오는 기(氣)의 번역어이다―이 골격을 이루고, 붓의 필치가 빚어내는 우주의 선(ligne d'univers)들이 교차한다는 동양화의 정신성을 고도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선종의 대가들이 연애시를 선의 메타포로 고양시키는 것과 유사한 작업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TV-선(禪)’의 경지를 추구하는 작업인 것이다. 이이남의 기존 작품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 방향에는 이런 숭고화 경향이 의외로 강한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방식으로는 네 발 짐승의 하반신으로 대변되는 추함의 경계 너머로 혼성을 감행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현대 예술의 자기 비평을 나름대로 발전시킨 메타 비평적 작업들이 포함될 것이다. 20세기 미술사의 유명한 스캔들 가운데 하나인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의 「예술가의 똥Merde d'Artiste」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질문의 의미는 자명하다. 자신의 똥을 밀봉한 90개의 깡통을 제작한 후 거기에 예술 작품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이런 행위는, 예술을 자본주의 시대의 배설물로 언급하는 철저한 자기 비평의 정신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이남의 작업이 이러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까? 
「뒤샹의 방」에서 이이남은 변기에 소변을 보는 뒤샹(M. Duchamp)의 모형물과, 별도로 전시된 변기의 내부에 포함된 디스플레이가 소변보는 장면을 재생하는 작품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이이남은 뒤샹을 소환하고, 오웰(G. Orwell)을 환기시킨다. 뒤샹을 자신이 다루는 매체와 결부시킴으로써, 이이남은 사실 오웰이 상상했던 디스토피아에서 매체가 차지하는 역할을 회의하면서, 비데오라는 매체의 표면과 이면이 갖는 또 다른 가능성의 영역을 탐구했던 백남준(白南準)을 언급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이남이 기존에 확립된 자신의 예술적 관행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롭다. 그렇다면 이이남은 이러한 자기 비평적인 현대 예술의 메타적 성격에 철저한 아방가르드적 아티스트를 꿈꾸는 것일까? 
마지막 방식은 자신의 작업을 직접 사회적 현실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이이남의 이번 전시가 5.18을 언급하는 작품들이나, 남도의 풍경을 포함하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할 경우 기존의 이이남의 작업이 가지는 특성들이 어떻게 이러한 사회적 발언을 하는 작품들과 예술적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된다. 그것은 설령 차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어디에서 어떻게 마련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새로이 구축되어야 할 미지의 실험에 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이남에게 최소한 이 세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통로가 열려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미 그의 작업에 잠복해 있고, 어떤 것은 이번 전시를 통해 언급하기 시작되었다. 이 시도들은 기존의 자신의 작업에 대해 비평적 관점을 제기하고, 그것의 한계와 가능성의 폭을 측량하고자 하는 예술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이 외에도 아날로그에 안녕을 고하고, 디지털의 예술 경험을 소개한다는 측면에서 이번 전시가 갖는 다양성들 속에는 아날로그적 경험의 추억과 새롭게 대두되거나 가까운 미래에 경험될 디지털적 시각 경험의 특징들이 다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부러 백남준의 과거 작품들과 유사하게 설치된 브라운관 TV의 탑들, 플랙시블 평판 디스플레이의 확장이 가져다 줄 스크린 벽의 시각 경험을 보여주는 벽 전체에 투사되는 새들의 자유로운 움직임, 자동차의 전면이나 심지어 측면 유리에도 탈부착이 가능하게 될 투명 디스플레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품 등등이 그것이다.  

7.
결론적으로 커다란 두 개의 축이 이이남의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하나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시대에 자신이 다루는 매체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시각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다. 두 번째는 이이남이 자신이 확립한 기존의 관행을 부분적으로 제약하고, 그 작업의 한계를 일신하려는 탐색기에 접어들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한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의 이이남을 형성한 그 독창성의 새로운 전형을 확보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예술가는 어쨌든 그렇게 하겠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유행하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예언한 것처럼 “시간이 모든 걸 대답해 줄 것이다.”

이향준(전남대 BK21사업단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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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크르의 진리성 - 이이남 작품론

칸트는 관객의 예술작품 감상이 관조적이라고 말했다. 이는 작품을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두고 감상하는 객관적 감성 체험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 작품은 체험이라는 경험적 과정을 통해 작품과 상호작용적인 상황에서 지각된다. 미디어 아트의 이런 상호작용 과정에는 인식의 작용과 더불어 실천적 현실에 대한 인간의 신체적인 개입이 전제된다. 작품을 하나의 현실처럼, 우리의 삶과 같은 강도의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이남의 작품은 직접적으로 참여를 언급하는 작품이 아니다. 차용에 의한 가상적인 이미지들의 조합을 보여주지만, 미술 일반에서 볼 때 관조적인 범주로부터 많이 벗어나 있지는 않다. 이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기억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역사적 사실들과 이미지적인 회상의 문제가 작품의 근본적 상황을 관통하고 있다. 이미지 자체가 과정으로서 하나의 인터페이스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고, 표현이 요구하는 텍스트적인 논리성에서 벗어나지도 않기 때문이다(그의 작품은 원작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그러므로 이해의 지평에서 보면 그의 작품은 주제가 중요한 토픽으로 전제된다. 즉 일련의 행위들이 현상적인 이미지를 과정적으로 구성하는 것이기 보다 주제에 의해 변주되는 이미지들의 은유적인 상황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아트를 이야기할 때 이미지의 은유는 2차적인 문제다. 은유적인 상황은 모더니즘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이남에게 이미지가 시각적인 특성으로 환원되고 있다는 점은 모더니즘적 회상의 양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더니즘이 요구하는 경험의 원리적 환원이라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에 이이남의 작품은 기존의 현상들에 대한 단순한 가공과 병치를 통해 성취되는 의미론적 총체성의 해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패러디의 특성을 띤다.

이이남의 작품에서 이미지 차원의 내러티브는, 텍스트적 구조를 전제하고 있는 확장적 성격 때문에 그 확장성이 요구하는 개입의 차원이 분명 관객의 경험적인 체험(전통매체 미술)과 참여(미디어 아트)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의 차이를 생각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본다면 뉴미디어는 존재의 성격을 사이버 스페이스와 같은 가상현실적인 공간에서 시간의 문제에 집중한다. 그러나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작품들은 존재의 성격을 규정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텍스트의 구조적인 결합적 마디들에서 의미 있는 결정적 순간을 찾으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어느 정도 공간적 미학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면에서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를 달리 볼 수 있는 차원이 형성되고, 관객의 존재가 작품의 내적인 상황에 개입하는가 혹은 외적인 주체로서 존재하는가가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를 구분해주는 중요한 경계이다.

21세기에 뉴미디어는 새로운 정신의 상징적 지표가 되었다. 사회문화적 상황은 물론 그 상황들이 변화하는 지평에서 미디어의 기능에 대한 이해 ― 예술적 정체성의 이해를 통한 인간 이해의 폭에 대한 ― 소통적인 이해가 뉴미디어 아트 시대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정착돼가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적인 내러티브의 구조에서 이미지적인 내러티브 구조로의 변화가 수반되어왔는데, 두 가지 내러티브 형식이 추구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의미의 개념적 제시가 관객의 감성적 방향성을 고려하는 쌍방향적인 소통 상황이 전제가 되는 능동적 감상의 차원으로 변화되어 간다. 이것은 문자 시대의 일방적 수용성의 단계를 뛰어넘는 이미지 시대의 상호작용적인 감성적 소통의 차원으로의 변화인 것이다. 이이남의 미디어 작품에서 시공간의 개념은 가상적인 상황으로 개방되고, 상상력이 개입해 존재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런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특성은 미디어적인 개방성이다(이것은 시대적 개방성일 수도 있고 미학적 개방성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선의 <인왕제색도>나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같은 조선시대의 회화 작품들에 움직임을 집어넣어 동영상이미지로 변화시킨 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인 <강희안-신고사관수도, 2009>와 <겸재 정선-인왕제색도, 2009>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확장시켜준다는 의미보다 기존 작품에 대한 재해석의 차원으로서 동영상 이미지의 가능성이 가질 수 있는 개방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가상적인 의미부여 가능성에 대한 단서로서의 작품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지만, 작가의 인식과 관객 지각의 균형 속에 예술 작품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강희안과 정선의 작품들이 이이남에 의해 재해석되어 움직임이 부여된 작품으로 존재하는 상황에서 원작과 이이남 작품에 대한 예술적 가치의 우열을 논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이이남의 동영상 작품들이 재현의 문제에서 어떤 진보적인 확장을 보여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즉 가능성의 문제로 재현적 이미지들의 진보성이 어느 정도 개진된다고 막연히 생각할 수는 있다. 이이남의 작품은 영화적인 재현과는 다르고,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예술 작품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가치를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분명히 작품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이남의 작품은 시간을 표현의 도구로 강력히 활용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미지적이라기보다는 텍스트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에게 이미지는 마치 영화적인 재현처럼 어떤 스토리를 구성하는 내러티브처럼 보인다. 이는 그가 존재에 대한 성찰이라는 예전 작품들의 관조적 특성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대상을 감각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독해하는 것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작품들은 다양한 관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소수 지식인 서클 안에서 서로 지성을 교류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움직임이 부여되었다는 면에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어떤 단서가 존재한다. 즉 감각이 반응하는 상황을 작품의 주된 구조로 제시했다는 면에서 양반 계급의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점유되었던 미술을 일반 평민들의 정서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좀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던 민속예술의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는 영화의 기원을 민속예술folk art로부터 찾는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사물에 생기를 부여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고 그런 열망들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적절하게 반영될 수 있었다는 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이남의 작품은 바로 그런 계기들을 기존의 이미지들에 반영한 것이다. 단순히 하나의 지적인 해석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작품들 안으로 우리의 감각이 침투할 수 있은 공간을 만들어준 것이다. 물론 감각은 작품을 해석하는 미학적인 틀이 아니었고, 철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감각의 활용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움직임은 반응의 측면에서 새로운 경험을 제시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움직임은 어떤 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활동을 모방한다는 면에서 미디어 아트의 미학적 태도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움직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와 인상은 움직임이 생명을 지닌 신체의 활동을 모방한다는 면에서 작품과 관객과의 거리를 사라지게 해주는 적절한 정신적, 물리적 장치로 작용한다. 이는 작품이 경외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친근한 속성을 공유하는 어떤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예술 형식에서는 전통매체작품(회화와 조각)의 일회적이고 권위적인 아우라로 부터 벗어나 삶의 상황들과 작품의 소통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작품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탈신비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술에 대한 논의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라는 것이고, 21세기 미디어 아트 예술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론적인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차용과 움직임이라는 면을 제외하면 이이남의 작품은 많은 면에서 모더니즘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전통매체 작품 제작의 접근 방식과 논리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의 예술적 태도의 문제가 중요한 미학적 질문의 원인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원작과 원작을 활용한 작품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해봐야만 한다. 원작은 예술작품으로서 모두가 받아들이는 것들이고, 이이남의 작품은 차용한 원작에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움직임을 부여한 것이다. 물론 움직임을 부여하는 과정과 거기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의 또 다른 차원의 조합이 예술적인 상황에서 벗어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동일성만 가지고 차이를 불식시키기에는 어떤 문제적 상황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엄밀한 의미의 차용이 일종의 거짓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혹은 기껏해야 하나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닌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의 설명적 동일성이 작품의 원인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패러디하고 차용한 싱글채널 작품인 <클림트-신키스, 2009>는 이미지의 움직임이 형상의 변화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이 이미지를 통해 변화하는 상황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재현적 형상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다. 즉 오브제적인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상태를 지향하는 미디어의 기록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화와 미디어의 차이를 지각과 감각의 차이처럼 제시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텍스트적인 내러티브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적인 내러티브가 감각과 맺는 순수성의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미지의 추상성이 촉각적인 경험의 차원에서 어떻게 의미를 내포할 수 있고, 또 그런 의미들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내재화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관객은 클림트의 작품을 통해 어떻게 이미지가 의미의 변화 없이 감각적 통일성을 제시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것은 예술 작품이 어떤 상황으로 제시되면서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구성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차용이 일종의 거짓 세계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차용이 가지고 있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정신성에 대한 반응이었고, 그런 반응들이 사회의 구조적인 요소들로서 작용하는 시대에 관한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차용으로 구성된 이이남의 작품이 21세기의 정신적 상황에 대한 미디어적 반응과 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여기서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역할과 특성이 우리 인간의 내면적이고 정신적인 것들과 긴밀한 관계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즉 그의 작품에서 어떤 미학적 질문의 형식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이 시대의 철학적 질문으로서 가능한가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껏해야 하나의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뿐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차용과 패러디가 가지고 있는 미시적인 근본적 속성들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차용이라는 것은 단지 형태를 가져오는 것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대적, 환경적인 맥락에 원본을 존재시킴으로서 형상이 가질 수 있는 정신적 양태들을 의미론적 과정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생산되는 패러디적인 상황은 자연스럽게 원본의 가치가 아니라 삶의 가치를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감각적 현실에 충실한 상황은 진실의 문제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즉 내러티브는 사실과 진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진리성에 대해 언급하기 때문이다.

원본과 복제의 예술적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분명히 다음 시대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보들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성이 원본의 생산성을 넘어서 있을 뿐만이 아니라 많은 면에서 원본의 생산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 21세기 사회에서 감각은 또 다른 존재의 명칭이다. 그리고 그 존재는 성격을 규정하는 차원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평 자체에 대한 가상현실적인 상황을 삶과 현실의 지표로 설정한다. 이런 면에서 이이남의 작품이 제시하고 있는 예술적 상황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시 한 번 강조할 수 있는 것으로 오브제가 더 이상 작품의 존재론적 중심이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린버그가 강조했던 추상표현주의 작품들이 회화적 한계를 통해 존재의 특성을 쟁취하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미디어 아트 작품의 비물질적인 본질 때문에 물리적인 한계는 존재하지 않고 그동안 미학적 철학적 이해의 지평에서 철저히 외면당해왔던 감각을 존재의 본질적 속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이남의 작품은 감각이 어떻게 새로운 예술적 상황을 전개시킬 수 있으며, 어떻게 시뮬라크르 시대의 예술적 속성을 보여주는지 모델이 될 수 있다.
       

정용도(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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