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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낙범, 코리아나미술관 스페이스*C

출생

1960, 서울

장르

회화, 설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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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ee-Person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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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낙범 회화의 힘, 색

색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을 가늠해보기 위해, 색이 없는 세상을 가만히 상상해보자. 그러면 하늘과 바다는 어떻게 구분하고, 하늘 위의 태양과 달, 별은 어떻게 구분하며, 나무와 풀, 흙, 인간, 동물들은 어떻게 나타나 보일 것인가? 어쩌면 우리는 존재와 무, 부피, 형태로만 드러나는 매우 단순한 세상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신체에 있어서도 역시 시각 보다는 다른 감각 기관들이 발달하고, 따라서 진화와 문명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될 것이다. 색을 볼 줄 모르는 동물들은 청각과 후각이 극도로 발달하여 인간과는 다르게 세상을 인식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우리가 색을 의식적으로 느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다만 색이 인간에게 물이나 공기처럼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만약 색이 다른 필수 요소들처럼 존재하지 않거나 결핍된다면 비로소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것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요소들은 과학이나 철학, 인간 지능의 발달과 함께 그 구성 요소, 기능, 그리고 의미가 대체로 분명하게 정의되지만, 색에 관한 정의만큼은 아직도 모호하고 아리송하게 남아 있다. 물론 색이 우리 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이론가들과 철학자,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색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 만큼 색은 우리 인간의 역사와 함께 변천해 오며 그 이론과 담론, 그리고 제작과 이용법 등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말하자면 색에 관한 단 하나의 정의란 불가능하며, 색은 각 분야의 역사 속에서 정의 내려져야 하는 극히 복수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과학적 색, 예술적 색, 산업적 색, 심리적 색, 의학적 색, 상징적 색, 종교적 색 등이 각각 따로 존재하며, 그 속에서 색은 그 기능과 역할, 정의, 취급, 가치, 용법들이 달리 구분되고, 이에 따라 각각의 분야에는 각각의 색이 존재하고, 그 색조차도 지역과 역사에 따라 분화를 거듭한다. 그리고 또 각 분야는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에, 어느 한 분야의 색을 연구한다 하더라도 주변의 색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예술적 색을 고려하기 위해서도 철학자들이 정의한 색으로부터 과학자들이 정의하고 만들어 낸 색, 그리고 색채의 생산과 유통까지도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낙범의 회화 속에서 색을 말하기 위해 상당히 긴 개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색 자체는 아무 말이 없다. 따라서 그 참조물과 기준점 없는 무중력을 중심으로 수없이 많은 근거가 빈약한 추측성 담론들이 형성되고, 그 끝없는 담론들은 색을 더욱 난해하고 신비롭게만 만들며 우리와 더욱 멀어지게 만든다. 그러나 회화사 속의 색은 그 나름대로 어렴풋한 윤곽이 그려져 있고, 각각의 예술가들은 그 회화사 속에서 자신의 좌표를 설정하기에, 그것을 염두에 두고 도구 삼아 길을 헤쳐 나가는 것이 애매모호한 담론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고낙범의 색은 우선 자연적 색으로부터 추상화의 길을 밟아 온다. 그런 점에서 그의 색은 칸딘스키의 색과 상당히 유사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색은 칸딘스키의 색에서 보이는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단계까지는 아직 미치지 못한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고낙범 스스로 거절했다함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칸딘스키가 보여주듯 색을 자신의 인위적 체계 속에 맞추려고 하면 결국은 독단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자기만 아는 체계화 속에 또 다시 색을 가두게 되기 때문이다. 고낙범은 기왕에 해방된 색을 또 다른 규율과 시스템 속에 가두기보다는 해방된 상태 그대로 놓아두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칸딘스키나 이브 클랭 등의 색이 평온과 안정감을 상징하거나 의미한다면, 고낙범의 파란색은 ‘글쎄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경우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하거나, 아니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을 지적하거나 환기하고자 한다. 그 모든 것을 고낙범은 여러 가지 색들의 종합으로 보이는 나팔꽃 한 송이에 담고 있지 않는가? 그는 나팔꽃 속에서 모든 형태들과 색들의 종합을 읽어내며, 어떤 생성의 근원과 같은 것을 품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것은 사물이면서 색이고, 대상이면서 추상이며, 노골적 관능이면서 고고한 정신적 승화이기도 하다. 세잔의 사과, 고호의 해바라기, 칸딘스키의 삼각형처럼 아마 고낙범도 자신의 나팔꽃 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고 싶었던 것 같다.
나팔꽃이 오각형이듯 고낙범의 색의 형태도 오각형이다. 그는 오각형 속에서 안정과 동시에 변화를 발견한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오각형이 순전히 사변적인 관념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나팔꽃을 증거처럼 제시한다. 개별적인 개체로서 나팔꽃은 오각형이지만, 그 오각형은 또 그가 초기에 그렸던 정물의 경계선에서도 추상화 될 수 있다. 따라서 고낙범은 너무나 안정적이면서 또 날카로운 삼각형이나, 로베르 들로네에게서 보이는 어떤 만유공통을 상징하는 밍밍한 원보다는 안정과 동시에 변화를 품고 있는 오각형 쪽에 더 끌렸음 직 하다. “우리의 수평적, 수직적 시선에 대한 사선적이며 비스듬한 시선에 관심을 옮겨가며 나팔꽃을 그리기 시작했다”라고 작가는 확인해 준다. 기실 오각형은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더 쉽게 팽창해나갈 수 있으며, 오각형의 연속들은 그 안과 밖의 구분이 불명확하다. 즉 한 오각형의 안쪽은 연속적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다른 오각형들의 바깥인 셈이다. 따라서 오각형은 나팔꽃의 형이고, 그 색의 형이며, 이중성의 기호이자 그것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안과 밖의 구분이면서 비구분, 움직임과 정체의 공존, 단단한 안정감과 부드러운 변화감의 공존을 오각형 속에서 찾은 고낙범은 이제 이 오각형적인 기계, 나팔꽃을 가동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이 나팔꽃, 즉 오각형적인 색을 분해하면 혹자가 한국 전통의 색이라고 주장한 오방색이 만들어지고, 또 각각의 색들이 타악기나 피아노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게 되면 점점이 찬란한 색들의 군무가 된다. 이렇듯 고낙범의 색은 어떤 외적 대상의 보조물이 아니라 자체 내의 역동성을 지닌 스스로의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어떤 힘이고 그 힘은 오각형적인 틀을 거쳐 형상화 된다. 또 이 힘이 인간의 형상에 적용되면 초상화를 이루는데, 여기서 색은 도구적이고 재현적인 기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재현의 도구였던 고전적 회화의 색들을 분해하여 그 색으로 화가의 지인들의 초상화를 그린다. 이때 분해된 각각의 색은 새로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초상화의 단조로운 색들은 재현의 도구가 아닌 하나의 나타남, 출현, 어쩌면 하나의 ‘사건‘과 같은 우연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초상화는 기능과 정체성에 따라 분화된 얼굴을 그리는 것이라기보다 거대한 단색의 덩어리로, 어떤 기계적인 힘에 따라 색만 바꾸어서 단조롭게 반복하여 출현하는 끈끈한 물질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상화의 색은 새로움, 낯설음 대신, 거꾸로 정보적인 것, 도구적인 것에 대한 저항으로써 무덤덤하고 지루하게 현존하고 있을 따름이다.
고낙범 회화의 힘은 색 자체의 표현 가능성에 대한 탐사와 드러내기로부터 나온다. 색의 표현력이란 색이 형태를 위한 시녀 역할을 하면서 형의 표현력을 보충해주는 것이 아니라, 형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에두아르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작품을 색으로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이를 증명한다. 형태를 떠나 원본과 유사한 색의 사용 비율과 배치, 그리고 대비를 통해 추상적 형태로 구조된 새로운 색채 추상화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방식으로 원본의 분위기를 불러 일으켜주고, 나아가 기하학적 색채 추상화의 절제된 방식으로부터 특별하면서도 포괄적인, 산뜻하면서도 어디선가 보았음직한 다정한 감수성을 유발한다. 이 때 고낙범은 마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그렸던 방식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따라서 고낙범에게 ‘그림 그리기’ 란 일종의 ‘전이’이며 새로운 해석 작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과거의 그리기 방식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옮겨서, 그와 동일한 분위기와 감격을 불러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에 고낙범의 색에서는 수많은 대화가 들리는 것 같다. 과거 거장들의 그림에서 차용해 온 색들로 재결합한 초상화들의 상당부분은 그 자신이 발견해 낸 새로운 색의 언어로 과거와 대화를 하는 것이고, 또 나팔꽃처럼 자연을 그리고 그를 분해할 때에는 자연과의 대화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고낙범의 색의 사용은 우선 추상과 구상의 어느 한 쪽에 치우쳐서 다른 것을 멀리 하기보다는 그러한 대립을 넘어선 다른 영역, 즉 우리의 감수성과 맺고 있는 표현력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 표현력이 어떤 방식으로 나오는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초상화에서 드러나듯, 단일한 색조로서 그 안에서 채도와 명암의 미세한 변화들을 통해서 나오건, 아니면 여러 색들의 구조적인 결합을 통해서, 즉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나오건 상관없다. 단일 색조로 그려진 경우에 그의 작품은 하나의 악기로 연주되는 가락이 될 것이고, 여러 색의 조합일 경우에는 오케스트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정 없이 관객을 응시하는 초상화의 시선은 그 무표정에 의해 더욱 강력해 보이는데, 그럼으로써 그 시선은 색이 지닌 표현력의 응집이면서 고낙범의 전체적인 회화의 힘, 즉 평범한 것들의 미학을 은유한다. 그 오랜 옛날부터, 거장의 시대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들, 박제되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 모습, 의미 없는 행동들, 사건을 기다리는 나른하면서 긴장된 분위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집요하게 질문하는 듯한 시선을 통해 고낙범의 초상화는 단순함 속에 극적인 강조를 더한다. 그러나 고낙범은 고상한 것이건 평범한 것이건 공평하고 평범하게 그림으로써 예술의 위계를 제거하고, 평범한 것의 고급 예술이 아니라, 평범한 것의 평범한 예술을 실현한다. 그러면서 그는 평범한 외양이 숨기고 있는 것, 너무 단순하여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이게 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는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곧 폭력을 재현하지 않고서 폭력을 보이게 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고낙범은 이러한 은유의 작업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색의 내면적 울림을 통해 실현하고자 한다. 색은 누구에게나 강한 표현력의 상징이며, 동시에 고정된 공통의 의미는 없기에, 의미의 산출에 있어서는 그 어떤 기호보다도 강도가 높으면서도 개별적이다. 그래서 어떤 색에 대해서 각 개인은 나름대로의 깊은 내면과 개별적인 방식으로 공명하게 되어 있다. 고낙범은 바로 인간 개개인의 색에 대한 내면의 깊은 감수성에 연결하여 그것을 촉발시키고자 자신의 그림 그리기를 한정지우고 집중한다. 그것이 평범함 속에 혼란을 일으키는 그의 미학의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고흐나 고갱, 또는 들로네의 색들처럼 어떤 강력하고 시끄러우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색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칸딘스키, 몬드리안 또는 이브 클랭의 색처럼 추상화되고 차가운 지성의 틀을 지닌 것도 아니다. 불끈 솟아오르는 근육을 자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예민하고 서늘한 지성의 번쩍임으로 세상을 재단하려고도 하지 않는 색, 기성의 권력과 문화를 대변하고 그것을 과시하는 색에 대해, 그런 세상의 무모함과 덧없음을 드러내는 평범하고 수수한 색일 따름이다. 그러나 평범하고 수수하다는 것이, 연약하다는 것이 기성 가치에 대한 문제 제기의 힘이 부족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요란한 것이 소리 높여 공허한 소리를 지를 때에 조용히 눈에 띌 듯 말 듯한 미소로 응수하는, 누구도 언뜻 쉽게 시선을 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마주하면 혼란이 초래될 그런 미소를 지닌 색이다. 어떤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상업적으로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기록하기 위한 것도 아닌, 광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있지도 않고, 공허하게 타인을 흥분시키려고도 하지 않는 색이지만, 그 모호함과 낯설음 속에 혼란을 유발하고, 단단하고 확고한 기존의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도록 부추기며, 의미들의 절묘한 이동을 유발시키는 어떤 징후와도 같은 색이다. 강하고 두드러진 대상들 위에서 영구성을 과시하는 색이 아니라,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대상 위에서 잠시 의탁하고 가는 시간의 날개와도 같은 색이다. 그래서 고낙범의 회화는 우리 시대의 단순함과 평범함의 미학을 색에 적용한 그만의 독특한 색의 언어로 그려진다.

이수균 (KAP 감독, 미술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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