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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임, OCI 미술관

출생

1975, 소백산 풍기

장르

설치, 사진, 미디어

홈페이지

www.kimsoon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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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땅 2017, 2017

굴껍질, 무명실, 와이어, Variable 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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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 표상된 “삶의 형식”

I.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삶의 형식(form of life)”을 말한다실상 그가 말하는 삶의 형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이 개념을 명백히 규정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삶의 형식을 정의하기란 어렵지만그럼에도 삶이란 초월적 형식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물망처럼 엮어가는 어떤 문화적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널리 알려졌듯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주제는 언어이다그는 철학적 탐구에서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또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언어에서 사람들은 일치한다이것은 의견들의 일치가 아니라삶의 형식의 일치이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말하지만내가 생각하기에 언어를 예술로 바꾸어 읽어도 유의미하다예술을 상상하는 것은 삶의 형식을 상상하는 것이고예술에서 이루어지는 일치는 단순히 규정된 일치가 아니라 예술의 생산과 향유의 과정에서 공동체가 만들어가고 찾아가고 열어가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일치일 것이다김순임의 작업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다시 특별한 맥락에서 삶의 형식을 떠올린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그의 작업을 통해 재현된 삶의 형식에서 소재의 선택에서 주제에 이르기까지 주목할 만한 미학적 특징들을 감지한다나는 이 글에서 짧게나마 그 특징들을 언급해 보려한다.

 

II. 최근 김순임이 인천아트플랫폼의 건물에 설치했던 <땅이 된 바다-굴 땅>은 삶의 형식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바다라는 땅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람들의 일상을 예술적으로 표상하려는 시도가 한 눈에 파악되기 때문이다작품 제작과 과정이 그리 만만치는 않았다고 듣긴 했지만처음 얼핏 보기에 작품은 설치미술의 조형적 측면에서 볼 때 의외로 평범했다소재와 주제가 과도하게 연결된 듯도 하고 오브제의 활용에서 조형적 긴장감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느낌도 들었다그의 초기에서 최근에 이르는 작품들을 일별해 보노라면 김순임이 조형적 감각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작가임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그런데도 그는 이 설치작품에서 굳이 감각적인 요소를 의도적으로 뒤로 물러나게 하고 삶의 형식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둔다작품을 다시 바라보면서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이 문득 떠올랐다. ‘과연 우리는 설치미술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실상 중요한 것은 삶을 어떻게 예술적 형식으로 표상해내는가의 문제일 것이다니체가 특히 그의 중후기 사유에서 강조하듯이삶은 예술이고예술은 삶이라는 등식을 그의 설치작품에서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III. 김순임은 조각에서 출발했지만지금까지 특정한 장르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작업을 시도해왔다회화조각사진영상퍼포먼스설치 등을 아우르고다양한 방식으로 확장되어 온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것은 무엇일까삶의 형식으로서의 미학에 대한 작가의 지난한 추구이다이는 지난 몇 년간 여러 방식으로 전개된 그의 환경미술에서 보다 뚜렷이 드러난다인간과 자연의 공존그 본래적인 가능성의 자리에 예술은 놓여 있다그의 작업은 이를 확장된 예술의 놀이를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IV. 실이 작업의 재료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실상 실은 그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관계를 만들어가는달리 말해 가능하게 하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실은 하나의 기억을 또 다른 하나의 기억으로 이어가고엮어가는 회상의 촉발체이다실이 없다면이 세상의 모든 게 하릴없이 흩어질 것 같다는 그런 강박관념이 작업의 언저리에 놓여 있는 듯도 보인다그렇다면 실은 관계를 향한 욕망의 메타포라 보아도 될까그렇게 보기는 힘들다한 가닥의 실은 사실 여러 가닥의 가는 실이 중첩되고 뒤틀려 꼬여진 것이다그렇다면 실은 단지 관계를 지시하거나 또 암시하는 조형적 지표가 아니다실은 삶의 형식을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조형적 긴장으로 이끌어내는 미학적 장치인 것이다.

 

V. 또 그의 작업에서 돌이 자주 등장한다자연에서 채집한 돌은 작가에 의해 기록되기도 한다이때 돌은 자연과 문화 사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원초적인 예술적 재료가 된다흥미로운 것은 실에 매달린 돌이나 바닥에 놓인 돌을 통해 작가가 굳이 어떤 내러티브를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돌>이라고 명명하지만실상 돌은 날지도 않고 돌이 ’, 곧 작가일 수도 없다돌은 그 자체로 의미의 현현이다실로 돌을 매달고 돌에 깃털을 덧붙이는 작업을 두고 돌의 이중적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그렇지만 예술적 행위에 앞서 단지 그것이 돌임이 먼저 드러난다돌의 이름이 아니라 돌이 현전한다.

 

VI.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으로 보면김순임은 상당히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로 오해할 수도 있다사실은 그렇지 않다그는 기본적이고 단단한 조형성에 충실한 작가이다다만 그 조형성을 삶의 형식으로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지에 관심을 더 두기에 그의 작업은 감각적으로 치밀하게 구성된 작품과는 사뭇 다르게 보일 뿐이다몇몇 작업에서 그가 여러 나라의 레지던시에서 생활하고 경험했던 것들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중요한 것은 이런 생활과 경험이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국면을 예술로 확장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여기가 아닌 저기로의 여행은 보다 확장된 예술을 미적으로 체험하려는 작가의 욕망이자 몸짓이다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부질없는 또는 덧없는 흔적이다스쳐 지나가고 떠났던 그 모든 것은 다시 작업실로 귀환한다.

 

VII. 김순임은 문어발식으로(^^) 작업한다마음이 가는 대로이런 저런 작업을 마구 펼쳐 놓으면작가에게도 큰 부담이다. ‘이것이 김순임의 작업이다라고 뚜렷이 부각시키기도 힘들 터이다그런데 그는 이를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하다열심히 둘러보고찾고기록하고생각하는 작업이 그의 예술인 것처럼 말이다그러기에 아마 나는 김순임을 삶의 형식을 구현하는 작가라고 부르고 싶었던 것일 게다조형적으로 세련된 힘을 제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왜 이것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작업해야만 하는지를 묻고삶의 그 다양한 결들을 섬세하고 미묘한 방식으로무엇보다 긴장의 미학으로 재현하려는 그의 시도는 작업을 그만 두지 않는 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VIII. 예술을 사회적으로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만들어가기란 생각보다 용이하지 않다예술은 주관적이며작가 개인의 감각에서 출발한다그럼에도 칸트 미학이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듯이예술은 그 주관성 속에서 사회적이며 문화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보편성 – 개념적으로 규정된 보편성이 아니라 반성적으로 열려있는 예술적 보편성 을 지나쳐 갈 수 없다달리 말해가장 주관적인 예술은 사회 속에서 함께 존재하는 삶의 형식을 외면하는 것일 수는 없다이 짧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미학의 핵심을 묶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예술이란 주관성과 보편성 사이에 긴장으로 존재하는 삶의 형식을 표상하는 놀이라고나는 이 글에서 김순임의 작품에 나타난 조형적 특징 그가 발간한 두 권의 도록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을 상세하게 고찰하지 않았다정작 말하고 싶었던 건 그의 작업이 바로 이러한 삶의 형식으로 표상되는 놀이라는 점이다이렇듯 아름다운 놀이를 하는 작가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

임성훈 (미학,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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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따뜻할 것 같은

1

 

지난 시기 작가는 자연 속에서 영감을 받아 노동의 과정을 수반한 작업을 진행해왔다. 강물을 떠내려가는 나뭇잎 요를 만들고 숲 속에 들어가 누군가 머물 자리를 만들고 무명실로 돌을 매달아 공중을 날고 있는 돌들을 구성하고 또 전시장을 숲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그런식으로 작가는 자연과 인간, 환경과 인간의 만남과 관계를 사색하고 자신의 고유한 체험에 기반 한 어떤 태도를 만들어왔다.

 

근래에도 김순임 작가의 전시는 무명천과 무명실, 양모를 재료로 이어붙이고 연결하고 풀고 매듭을 만들고 바느질을 하고 매달고 어떤 오브제와 공간을 연출했다. 자연에 가까운 재료와 물질이 작가의 손을 매개로 사람의 얼굴로 만들어지고 오브제가 된다. 사람의 얼굴은 형이상학적이며 존재론적이다. 사람의 얼굴은 인류를 대표하는 거울이다.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을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시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눈을 맞추고 교감 하는 것은 신비한 체험이 된다. 수 십 년전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초상을 복원하는 체험에서 비롯된 작가의 사람의 얼굴에 대한 관심은 감각적 경험 뒤에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어떤 형이상학적 실재(Reality)를 향한다.

 

작가의 작품 가운데 양모로 인물을 만든 비둘기 소년이란 작품은 가장 도시적인 인물과 가장 자연적인 재료가 만난다.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중심인 뉴욕에서 한 이국 청년을 만나 경험을 작품으로 제작했다. 작가에게 뉴욕은 새로운 사람과 삶과 관계의 경험과 관련되어 자기 자신의 정신적 영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가는 그 청년을 미술작품으로 묘사하기 위해 손과 정성을 통해 의미 있는 오브제와 설치로 변형 한다. 양털을 직접 구해 일일이 털고 정리해서 작업재료로 재구성한다.

 

전시 연출을 보면 비둘기 소년과 연결된 또는 그 인물에서 나온 새 깃털이 부유한다. 비둘기가 남긴 깃털이겠지만, 이 깃털은 새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새는 어딘가로 떠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머리와 새깃털과 인물이 결합하는 형태는 이미 원시 벽화에서도 나오는데 샤먼을 의미한다.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건을 은유한다. 관객의 상상은 뉴욕의 한 평범한 청년에게서 인류사의 초기에 원형적인 샤머니즘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하얀 깃털과 양모와 인물은 현실과 비현실, 허상과 실재, 삶과 죽음, 이 세계와 저 세계, ()과 속()을 연결하고 있다. 귀한 어린양을 떠올리지 않아도 양이란 동물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번제(燔祭)물이며 문명화 이전의 인간 사회를 유지해 온 희생제의와 연결되며 인간을 대체하는 신성한 매개체이다.

 

미술에서 독창성의 문제, 조형적 상상력의 문제는 어느 순간 작가나 관객의 마음 또는 영적 문제와는 분리되어 미술 고유의 조형적 기술로서 다뤄져 온 면이 크다. 그러나 인류사를 보면 미술에서 조형적 독창성의 문제가 중시된 것은 최근 매운 짧은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오랫동안 현대미술이 종교의 역할을 대신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신성 또는 종교성을 일깨우는 한 방편으로 미술이 이해되었다. 이러한 미술의 의미는 미술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작가와 관객, 그리고 그 미술의 주문자의 정신적 소통, 영적 공감을 뜻한다. 모든 의미 있는 사건은 겉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사건과 사물의 집적과 어떤 마술적 작용을 통해 실상은 그것들이 의미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이런 식으로 현대문명이 망각해온 이미지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김순임 작가의 작업의 뿌리와 닿아 있는 지점들을 추측할 수 있다.

 

2

 

드로잉은 같다...말은 말로 사라지기도 하고, 글이 되기도 하고 소설이 되기도 하고 논문이 되기도 한다. 이 모든 문자로 정돈된 매체의 근원이 말이요 누구나 할 수 있다. 드로잉도 그러하다....실과 바늘은 내 언어요...내가 만나 자연 재료는 내 목소리이다.(2012년 작가 노트 중

 

김순임 작가의 작업과정은 나에 대한 이야기의 재현이고 나를 세우는 말이고 그 말과 조우遭遇하는 것이며, ‘나의 말(표현)이 귀환하는 것이다. ‘라는 존재자와 말이 만나서 하나로 되는 길 어딘가에서 예술을 만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의 일생이란 그리고 여자의 말이란 부차적인 것이거나 배제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여자의 언어, 여자의 존재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 온 것이 또한 사실이다. 김순임 작가의 작업에서 여자의 시선으로 여자의 말과 감각으로 시종일관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문화적 의미 또는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은유(隱喩)에서 평이하고 세속적인 현실의 차원으로 내려오더라도 모시와 양모는 모두 따듯함과 위안과 어떤 심리적 평온과 연결할 수 있다.

 

신체와 마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가 균형과 안정을 찾는 치유를 향한다. 무엇보다 그런 공간 또는 장소는 있을것 같은세계이다.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 같은 장소에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지금 이 곳이 아닌 곳은 분명 이곳과는 다를 것이다. 어떤 사람, 어떤 사물은 시간과 공간에 활력을 부여한다. 살아있게 만든다. 기억을 고양한다. 삶은 그와 같은 사람과 사물과의 만남과 관계 속에 구성되고 풍부해지고 그렇게 자라는 것이다.

 

작가는 2010년 퍼포먼스에서도 자신의 재료와 언어를 사용하여 백일몽을 꾸는 작가를 연상시키며 꿈과 현실과 작가가 만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잠을 잔다. 현실의 환경은 거대한 신도시로 급변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편안히 잠을 자며 작가는 몽상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침대를 끌고 돌며 실제 도로 옆에서 잠을 자는 퍼포먼스에서도 우리는 따듯한 이불과 베개를 놓칠 수 없다. 언 듯 미친 여자 노숙인이 보여주는 해괴한 풍경이다. 그리고 그것이 현대미술가로 살아가는 한 여성작가의 일상인 것이다. 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찾는 과정은 결코 편안하지도 따듯하고 안온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 과정을 비껴갈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내가 찾는 공간은 부드럽고 따뜻하게 영혼까지도 치료받을 것 같은 공간이다.(2007년 작가 노트 중)”

김노암 (세종문화회관 시각예술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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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날 씨앗들

   1980년 금강 자연미술제가 이듬해인1981년, 야투 야외현장미술 연구회로 출범했을 때 우리가 아는 미술은 거기 없었다.창립을 주도했던 임동식은 "그리지 않는 방법으로 금강에서의 느낌이나 생각을 표현" 하라고 했다. "야투는 자연과의 신선한 접촉을 통하여 야외미술을 연구하는 모임으로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그 두께, 그 가운데 모든 생명력을 예찬한다."는 야투의 선언문. 한데, 나는 김순임의 작품에서 야투의 미학적 특질을 읽는다. 그는 그 스스로 자연미술가임을 자처한적도 없고 자연미술 미학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 미술가도 아니다. 그가 '그리는 방법'과 '만드는 방법'을 모른 것도 아니고 또한 그 방법론이 미학적 세계와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잘 안다. 그러나 그는 '그리고 만드는 방법'이 미학을 선취하거나 더 상승 시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듯 하다. 오히려 익숙한 창작 방법론이 자유로운 예술관을 옭아 맬 수 있고 작품세계를 부자연스럽게 변질시킬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취한 방법이 '영매(靈寐 shaman)'와 에테르 공간(空間, The Ethereal Space)'이다. 물질적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적 매개자로서의 그와 그런 그가 생명을 부여하는 모궁(母宮)으로서의 공간(작업실). 이번 전시는 거기서 출발한다.


   그는 이번 전시를 '김순임의 생날 씨앗들'이라 명명했다. "나는 내 일이 '여행하는 농사꾼'이라 생각한다. 곳곳에 감추어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 발견하고, 그것을 돌보기도, 가꾸기도, 양분을 주어 성장시키기도 하며 열매를 기다렸다가 나누어 먹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의 작업실에 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의 작업실은 마치 누에의 고치집 같은, 거미의 거미줄 같은, 이미지 창조와 생산이 발아하는 공간임을, 그리되 그림에 속박되지 않고 만들되 조각에 속박되지 않는 무수한 '그리고 만들기'의 흔적이 공간에 가득하다. 나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는 마치 그 공간에서 십 수년을 수행해 온 작가인양' '공간의 시간성'을 무수히 싹 틔웠다. 썩은 나무에 기생하는 수십 수백의 버섯처럼 '시간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기생했다. 그는 그 공간에서 스스로 에테르체이자 에테르간이 되었다." 우리 미학에 생생지리(生生之理)'의 개념이 있다. 모든 생물이 생기고 번식하는 자연의 이치를 뜻한다. 그는 그의 몸을 나무의 몸으로 치환한 듯 하다. 전시장의 모든 작품은 생생지리의 미학적 증거물처럼 싱싱하게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가지는 사유의 시간성을 상징한다. 크고 작은 가지들의 마디마디가 작업실이라는 공간에 붙어 있었다. 담쟁이 넝쿨처럼 붙어서 그것들은 숭고한 미학적 은유가 되었다.

김종길 (경기도미술관 교육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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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hereal : 지극히 가볍고 여린 ; 천상의 - 김순임 예술의 미학적 에테르(ether)에 관한 몇 가지 사유(思惟)

1. 지극한 상징언어

   그의 작가적 순례는 오롯이 개인전에 새겨져있다. 개인전의 주제는 순례의 여정에서 꽃 피운 예술적 향취일 터다. “The Ethereal Space”(07), “알려지지 않은 신의 얼굴”(07), “I meet with stone-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08), “Ethereal”(08), “The Thread, The Memory”(09), “The Forest of Strayer”(10), “Mind Space”(11). 그 중 나는 “Ethereal”에 주목한다. 그 뜻은 이렇다. 지극히 가볍고 여린 ; 천상의. 


   하나의 뜻이 한 작가의 세계 전체를 관통하기는 어렵다. 그 어려움에 진리가 있다. 김순임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ethereal body”를 에테르체(體)라 하듯이 첫 개인전 “The Ethereal Space”를 에테르간(間)이라 부를 수 있다면, “단순한 물질적 형태로서의 육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자(靈姿:영적 자태) 또는 생명체”의 의미를 그대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물질적 형태로서의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영자가 바로 그것. 영자는 작품보다 작품을 둘러싼 공간이나 작품이 설치된 공간에 더 적합하고, 간접적으로는 작가를 가리킨다. 그러니 그의 미학적 태도는 이미 첫 개인전에서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바꿔 말하면 그는 영자의 태도를 가진 영매(靈媒. shaman)와 다르지 않다. 그 이듬해의 “Ethereal”은 영매의 육체를 감추고 영매의 미학적 짓거리를 은유로 드러내는 변화의 큰 마디이면서 지속이다. 이렇게 볼 때, “The Ethereal Space”는 작품이 탄생하고 설치되고 전시되고 해체되고 사라지는 생로병사의 자궁이고, “Ethereal”은 생멸(生滅)의 작품에 깃든 지극한 상징언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숭고한 미학적 은유
   2012년, OCI미술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순임의 작업은 “Ethereal”의 ‘지속’에서 읽힌다. 국내외 레지던시에 참여해 온 그는 수 년 간 유목적 삶에 처했다. 그래서 작품 기획이나 프로젝트 기획, 주제 탐색을 위한 목적성과 무관하게 물리적 장소와 공간은 쉼 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예술적 둥지의 변화를 ‘자리바꿈’이라 한다면, 그는 이 자리바꿈의 변화에 놀라울 정도로 잘 적응했던 것이다. 이번 레지던시에서 그가 보여준 최대의 작품도 ‘작업실-공간’ 그 자체일 것이다. 그는 마치 그 공간에서 십 수 년을 수행해 온 작가인양 ‘공간의 시간성’을 무수히 싹틔웠다. 썩은 나무에 기생하는 수십 수백의 버섯처럼 ‘시간성’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기생했다. 그는 그 공간에서 스스로 에테르체이자 에테르간이 되었다. 노자 『도덕경』을 옮겨 적은 문자 드로잉이나 울펠팅으로 제작한 얼굴들, 목탄 드로잉과 인체 모델링 그 외 숱한 작업의 흔적들은 그가 그의 시간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가늠케 한다. 나는 그의 에테르체와 에테르간을 나무와 자연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구도화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 : 에테르간 : 작업실 공간 / 나무 : 에테르체 : 작품(혹은 작가)] 
   그의 몸은 나무의 몸이다. 사유의 시간성은 나무의 가지다. 크고 작은 가지들의 마디마디가 작업실이라는 공간에 붙어있다. 담쟁이덩굴처럼 붙어서 그것들은 숭고한 미학적 은유가 된다.

3. 개념의 짓거리
   덩굴의 뿌리마다 붙어 있는 미학적 은유로서의 “Ethereal”은 어디에서 탄생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을 ‘짓거리’에서 보았다. 짓거리는 또 무엇인가? 미술하기의 ‘~하기’를 말한다. ‘~하기’는 “무엇무엇하기”로 읽는데, 이때 무엇무엇이란 상상의 씨알에 근거한다. 그리고 ‘하기’는 과정으로서의 놀이/놀음을 뜻한다. 상상의 씨알을 굴리는 놀이/놀음이 김순임의 짓거리란 얘기. 
   작업실에서 만난 김순임은 끊임이 없었다. 차를 따르고 과일을 준비하는 ‘만남의 관계성’에서 조차 그는 예술가의 태도를 지속했다. 그의 작업실에서 ‘나’는 관객이 아니라 포섭된 관계망의 ‘어떤 인물’처럼 느껴졌다. 어느 순간 나 또한 그의 시간성으로 쏙 빨려 들어간 느낌이랄까. 쟁이든 꾼이든 광대나 무당이 된다는 것은 총체적 예술가가 되는 것을 말한다. ‘짓거리’를 할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는 것은 ‘~하기’를 이끌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 그는 놀이/놀음의 판을 작업실에 구축한 뒤 작업을 시작했다. 
   ‘미술하기’는 ‘품’이라는 결과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물성이어야 하는 이유도 하등 관계가 없다. ‘미술하기’는 오직 ‘~하기’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다가 간혹 어떤 결과물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단 얘기. 여기서 잠깐, 그렇다면 미술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생긴다. 분명히 ‘~하기’라면 ‘미술하기’의 ‘미술’이 무엇이냐는 것. 나는 그것이 바로 ‘짓’, ‘놀이/놀음’과 관계있다고 본다. 미술은 짓거리 즉 놀이/놀음이다. 개념 없는 짓거리일 수 있고, 개념 있는 놀이일 수 있다. 개념의 안팎을 에두르면서 놀아나는 그 짓거리야 말로 미술의 고유한 본래적 속성이 아닐까? 김순임의 작품들은 바로 거기에 있다.


4. 있는 듯하고 없는 듯하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목화솜 이불의 호청 갈던 날을 기억한다. 그 기억에서 솜과 광목을 생각해 냈다. 또한 그는 매우 추웠던 해외 레지던시에서 따듯하고 부드러운 기억을 만들어준 양털을 기억한다. 그 기억에서 양털을 생각해 냈다. 그런 다음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스스로에게 침잠하여 오래도록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바느질이 그것이다. 바느질로 가족이나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 꿈에서 만난 사람들을 탄생시켰다. 무채색의 솜, 광목, 양털로 제작한 그들은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한다. 
   사람들(얼굴들), 돌멩이들, 바늘들, 나뭇가지들, 실들의 세계는 지극히 가볍고 여리다. 그 세계는 실재였으나 기억에 기명된 세계이기에 그렇다. 기억은 현존과 체험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의식의 안쪽에 생성되는 정신 기능이다. 김순임은 기억의 원리와 본질을 따지듯 한 땀 한 땀 그 세계로 진입하고 구성했다. 하여, 나는 그의 미학적 에테르를 ‘기억의 철학’이라 부르고 싶다. 사회적 사건에서의 ‘개인주체 살리기’를 기억투쟁의 관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개인의 사건에서 발생하는 한 예술가의 기억을 철학적 관점에서 ‘상징투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김순임의 기억의 철학을 상징투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철학적 뿌리에서 다시 기억, 주체, 탈자태(탈영자), 이미지, 유사성의 개념들을 추출할 수 있지 않을까? 


“재현된 사람들의 얼굴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나는 나의 성장과정에서 또는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업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다른 누군가를 닮아 있어서 보는 이들로 그들의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다시 말해 나에게 기억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어떤 이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얼굴들이다.

김종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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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주의 만남이 주선하는 따뜻함과 불편함 : <김순임의 자기 언어 critic & column>

   김순임은 자신과 그 바깥 세계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기억을 시각화 하는 예술가이다. 그는 부드러운 소재의 따뜻함과 더불어 그 속에 담긴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비판적 지식 생산으로서의 예술이 가져야할 처신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작가이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진솔한 자기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이며, 그러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비정주의 숙명을 타고난 작가이다. 지금까지 그가 만나온 세계와 예술적 소재들은 이후의 새로운 만남에 의해 새롭게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그가 누구를 만나는지, 그가 언제 어디를 가는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헤아려보는 일이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김순임의 스타일이나 내러티브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그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장소, 시기 등과 같은 그의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 만남
   그는 인간과 물질, 개인과 세계의 만남을 매개하고 증거하는 작업을 하는 작가이다. 그가 작업실 작업에서 사람을 다루는 것과 바깥 공간에서 사물을 다루는 작업은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인다. 그가 생산하는 인물의 형상은 흙으로 만들어 합성수지로 떠내는 인물 조상과 마찬가지로 특정 인물의 형상을 지닌 재현미술의 범주에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작 다루고자 하는 것은 만남이라는 자신의 일관된 문제 의식을 표출하는 것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연물을 다루는 관점도 늘 만남에 방점을 찍고 있다. 따라서 김순임에게 있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신이 만난 대상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는 철저하게 체험에 근거한 자기언어에 포커스를 두고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서 스타일을 확장하면서 내러티브의 진폭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휴머니즘은 김순임 작업의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자신이 만난 인간의 면면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는 화려하게 꾸미거나 심난하게 과장하지 않는 진솔한 자세로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난 인간을 이야기한다. 김순임의 휴머니즘은 체험적이며 자기고백적이다. 그는 범신론의 관점에서 인간애를 다룬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재현하는 김순임의 작업은 삶을 성찰하는 휴머니즘의 관점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는 유신론자에서 범신론자로 종교적 입장을 전환한 사람이다. 범신론자는 무신론자와 다르다. 그러나 그는 종교의 영영과 예술의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런 이유로 휴머니즘을 채택하고 있는 김순임은 종교적 범신론과 철학적 휴머니즘을 동시에 가진 것이기는 하되 예술가로서의 실천 범주를 체험적 현실 세계에 두고 있다.
   물질과의 만남 또한 김순임의 작업을 독해하는 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변수이다. 나무, , 실 등 비교적 인공의 흔적이 적은 소재들과 생활 주변의 소재들을 작품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물질의 결정력을 매우 부드럽게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품안으로 바짝 끌어당길 줄 아는 작가이다. 그는 물질의 텍스트를 자신의 콘텍스트로 끌어들이는 좋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 김순임은 물질의 특성을 화려한 수사로 변용하지 않는다. 그는 물질의 본성을 살리면서 그 속에서 톡특한 스타일을 창출한다. 따라서 김순임에게 있어 물질은 만남의 대상이면서 조형의 질료이다.
   그의 작품들은 생태론적 논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살면서 만난 소재들로 작업에 끌어들인다. 작업을 위해서 소재를 찾아다니지 않는다는 얘기다. 금강자연미술제와 같은 야외공간에서 자연환경 속에서 제작 가능한 작업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물론 특정 장소를 방문하면 반드시 돌멩이를 주워서 기록하고 채집하는 작업을 하기도 한다. <어디서 굴러먹던 돌멩이>와 같은 오브제 채집은 그가 가장 오랫동안 천착하고 있는 작업이다. 작업의 장소의 문맥을 타는 것도 장점이다. 그는 작품이 자리하는 공간 자체의 분위기를 매우 중요시 한다. 주어진 공간에 맞춰서 작업하는 것에 매우 익숙한 설치 작가이기 때문이다.


2. 떠돌아다님
   떠돌아다님. 그것은 김순임을 곧추세우는 매우 중요한 행위이다. 그는 새로운 장소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체험을 얻는다. 그의 체험은 따라서 예술적 실천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그는 새로운 체험으로부터 삶을 배우고, 예술적 에너지를 얻는다. 그는 주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떠도는 운명에 처해있다. 몇 차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그에게 임시 정주의 묘미를 알게 했을 것이다. 옮겨 다니는 장소로부터 받는 새로운 체험은 한 장소에서 정주하며 작업하는 작가들에 비할 바 아닌 엄청난 에너지이다. 그는 새로운 장소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세계를 성찰한다.
   비정주(非定住)는 김순임의 숙명이다. 그것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천형과도 같은 것이다. 비정주 개념의 예술가 김순임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일탈의 서사를 직조한다. 한 장소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기복재를 하거나 자기 속을 후벼 팔 수밖에 없다. 떠돌아다니는 김순임은 무한한 변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돌을 만나면 돌을 줍고, 나무를 만나면 나무를 추스르고, 솜을 만나면 그 솜을 어루만지는 작가가 김순임이다. 제도화한 창작공간에서도 그는 떠돌아다님의 숙명을 긍정적인 에너지로 소화하고 있다. 만약 그가 문래동 철공소에 가서 자리를 잡는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망치와 용접봉을 잡을 것이다. 이것이 머무르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김순임의 숙명 같은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김순임을 가장 효율적으로 대변하는 작업은 돌멩이 작업이다. 김순임은 돌멩이를 발견한 장소의 정황을 그대로 담고 있는 사진과 실재의 돌멩이를 함게 보여준다. 최초의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한 후 그는 사물을 만난 날짜와 장소를 돌멩이 위에 적은 후 채집한다. 돌멩이와 자신의 만남을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하고 그 기록과 실물을 전시장에 투척한다. 사진 미디어에 의한 사물의 이미지와 사물 그 자체는 작가의 행위를 증거하는 두 갈래 길이다. 사물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사진과 채집된 사물로서의 돌멩이 사이에는 만남의 기억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존한다.
   사진 미디어가 기록한 사물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채집된 오브제가 담고 있는 실재 사물 그 자체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그는 낯선 장소에서 만난 사물의 기억을 제시한다. 그가 만난 돌멩이는 수원과 안양, 공주, 서울을 비롯해서 미국의 버몬트, 일본의 도쿄, 후쿠시마를 잇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록과 채집 행위는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예술가 주체 김순임의 여정을 증거한다. 그가 채집한 돌멩이들은 심미적 가치를 담보하기 위해서 허구적인 수사를 입은 미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엄밀하고 객관적인 문자 정보만을 담고 있는 평범한 돌멩이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돌멩이들의 연쇄는 예술가의 행위를 증거하는 대리물로 작용함으로써 예술적 오브제로 거듭난다.


3. 따뜻함과 불편함
   김순임은 따뜻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제공하는 예술가이다. 그의 작업들 가운데 다수의 근작들이 천이나 실 등의 섬유 소재를 이용한 인간의 형상인데, 이때 그의 인(간형)상이 상투적인 설정과 표현에 머문 것이었다면 우리는 그의 작업을 키치의 일환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정반대이다. 그가 다루는 인간의 면면이나 형상 표현의 방식이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독특함은 천과 솜과 실이 만나는 방식에 관한 김순임 나름의 어법에서 기인한다.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만남을 효과적으로 형상화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이 있는가 하면 차갑고 무서운 면이 동시에 드러나기도 한다.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인물 형상이 아니고 회한과 시름에 잠긴 것이기도 하다. 때로 그는 인물 아래에 주렁주렁 바늘을 달기도 한다. 아프고 시린 상처를 담아내는 것도 그의 진솔한 인간 이해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는 꾸며진 아름다움의 허구를 회피한다. 부드러움 속에 세월의 상처와 처연함이 공존하는 것이다. 온화한 표정과 자세로 잠든 것 같은 인물은 어떻게 보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이불에 들러붙을 것 같은 할머니의 피곤한 모습은 편안한 휴식인 것 같지만 노구의 처연한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것이 김순임 작업에서 친근함과 불편함이 같이 묻어나는 까닭이다. 부드러운 재료를 이렇게 불편하게 사용하는 일은 참 드문 일이다. 대체로 섬유 소재를 선택하는 작업들이 여성성 운운하며 작위적인 감상을 불어넣는 것에 비해서 그 부드러움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에 김순임의 매력이 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와 더불어 그의 감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 진솔한 자기표현이라는 것은 그가 구사하는 서사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그의 스타일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만한 것이 인공적인 물질이나 행위를 제작하고 수행하는 예술가의 존재 이유와 방식이다. 예술가는 숙명적으로 꾸민다. 예술가의 존재와 예술작품의 생산물이 따로 노는 상황이 발생하는/할 수도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예술가 주체의 존재와 결별한 예술 작품은 매력 없는 공산품과 다를 바 없다. 매우 단정하고 부드러운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따뜻하면서도 불편한 작품들의 면면은 그의 작업을 단숨에 규정할 수 없게 하는, 그래서 해석의 여지를 풍부하게 만드는 매력으로 작용한다. 김순임에게 있어서 그꾸민다는 행위는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감성으로 드러낸다는 것으로 직결한다. 이것이 내적 필연에 근거한 예술행위를 수행하는 김순임의 미덕이다.


4. 내적 필연과 자기 언어
   그는 특정 매체에 묶이지 않고 다양한 매체로 접근하는 멀티플레이어이다. 그가 구사하는 작업 재료는 섬유소재에 집중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다양하다. 그는 거의 모든 작업의 초기에 드로잉을 한다. 특히 인간의 형상을 입체화 하기 전에 하는 드로잉 작업은 소조 작업과 캐스팅, 실이나 천 작업으로 이어진다. 천에 바느질을 하고, 종이로 입체조형을 하는 일, 실을 이용해서 입체를 감싸는 일, 울로 바느질하고 덩어리를 만들기, 실로 설치하기 등 섬유 소재를 가지고 평면과 조형과 설치를 두루 관통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기록을 넘어서 그 자체로 설치작업의 일부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는 행위와 드로잉, 조형 작업과 설치 작업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커다란 천 하나를 펼치고 그 속에서 부분적으로 입체의 인물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방식이다.
   동일한 형상을 지녔을지라도 그 형상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의 디테일이 어떠한지, 그 질료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었는지에 따라 관객에게 전달되는 울림은 매우 다를 수 있다. 명주실을 한 올 한 올 입체 위에 붙여 나가는 지난한 노동의 과정을 거치는 김순임의 작업은 과정의 지난함을 통해서 한층 더 깊은 감성의 울림을 제시한다. 근간 그가 가질 개인전은 천상의 공간 정도로 번역 가능한 “ethereal space”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실을 붙여서 만든 인물과 배경의 소백산 풍경이 공존하는 설치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옷고름처럼 긴 천에다가 붉은 실로 하지 못한 말들을 213개 적어서 매달아서 흩날리게 만드는 설치 작업도 나온다. 일본에서 만난 할머니를 울로 만든 작품도 있다. 작품의 소재가 가벼우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김순임은 소백산 자락 풍기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소박하면서도 단단한 그의 품성은 작업의 주제나 소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작가의 발언이 내적 필연성으로부터 발현하는 진솔한 자기언어일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원천이다. 예술 작품의 생산과 소비가 의미의 생산과 소통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교환가치의 극대화나 공허한 언어 게임으로 귀착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장 속에서 김순임과 같은 예술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자연으로부터 삶을 배우면서 한 인간으로 성장했으며, 예술가로 살아가는 오늘날까지도 원천적인 에너지를 수혈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관한 기억을 소중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우리가 김순임으로부터 예술 생산이 소통 기제로 작동할 수 있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만든 예술 작품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김순임이라는 한 인간이 만들어낸 자기언어에 대한 신뢰 덕분일 것이다.


김준기(미술평론가, 현 제주도립미술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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