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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토탈미술관 facebook

출생

1964, 도계

장르

회화, 설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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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의 레이어그래프_정효섭 기획
참여작가
임정은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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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작가가 제안하는 제각기 다른 사각형의 형태는 카메라의 파인더가 잡아내는 한 장 한 장의 사진처럼 작가가 주지하는 삶의 시각에 이어져 있다. 유리에칭 기법을 이용해 만든 낱장의 면들에 빛이 투영되면서 나타나는 형상은 사각형의 본질처럼 정갈하고, 단단해 보인다. 각기 다른 사각의 그림자와 색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겹침은 하나의 무리를 이루어 다채로운 색으로 벽면을 수놓는다. 작가에게 있어 사각형의 형태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공간이다. 작가의 작품은 부분의 사각형을 볼 것인지, 사각형의 군집을 볼 것인지, 혹은 그 사이에서 겹쳐지는 빛의 형상들을 볼 것인지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접근이 가능하다. 허나 사각형의 체계에 음악적이고 유연한 변주라는 단어를 접목하여 일련의 작품 시리즈를 “사각형의 변주”라 말하는 것은 작가가 사각형을 비단 완성된 형태로 보지 않으며, 그것들이 해체되고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형상들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설정해 둔 빛의 각도와 층위에 따라 나타나는 형상은 시각적인 유희와 함께 보다 확장된 사이의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각형의 면(面)은 표면이 아닌 얼굴에 가까우며, 면과 면이 만나 겹침을 만들어내듯 우리는 그 사이에서 작가를,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낱낱의 사각형은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객체로, 그 자체만으로는 온전한 면이 되지 못한다. 마치 사람과 사람이 맞닥뜨리고 조화를 이루며 불완전한 서로를 보완해나가는 것처럼 주변한 면, 혹은 층으로 나누어진 선들은 겹을 이루며 비로소 완성된 형태가 된다. 또한 유리면에 비친 각기 다른 색의 그림자가 포개어지며 또 다른 빛깔을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시너지인 즉, 사각형의 변주인 것이다. 유리면 위에 색을 입히는 방법 중 에칭과 세리그라프(실크스크린)기법은 숙련된 기술과인내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작가가 직접 유리면 위에 한 땀 한 땀 공들여 새긴 사각형은 일종의 언어로, 문장을 위한 낱개의 단어처럼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기제가 된다. 작가는 작업의 과정 속에 쌓아온 시간과 정성을 그대로 내어 보이면서 우리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그리고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반복해서 축적되는 시간의 겹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며 시선이 겹쳐지고 있는 순간에 대해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환영놀이

임정은(Lim, JeoungEun)의 유리작업은 크게 평면과 설치, 이렇게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먼저 평면작업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유리에칭을 들 수 있다. 압축된 공기와 함께 금강사를 분사해서 유리의 표면을 갈아내는 식의, 일명 모래치기 기법으로써 투명한 유리판에다가 기하학적인 형상을 새기는 것이다. 사각형을 기본 모듈로 해서 이를 입방체 등의 다양한 유형으로 변주해낸 형상들의 그 자체는 평면이지만, 거기에 적용된 에칭의 차이(이는 화면상에서 미묘한 명암의 차이로 나타난다)로 인해 형상들이 입체로 보인다.

작가는 이러한 유리판들을 일정 간격을 두고 중첩시켜 나가는데, 대개는 두 세장 정도를 겹치지만, 경우에 따라서 중첩되는 판의 수를 늘려 일루전 효과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때 유리판과 다른 유리판간의 간격으로 인해 그림자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표면 이미지와 어우러져 사각형의 변주를 강화시킨다. 이는 평면이면서 동시에 입체의 환영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그 이미지로부터 유래한 그림자가 겹쳐짐으로써 다양하게 변주된 사각형과 입방체들이 마치 무중력이거나 무한대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여기서 착각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까 착각, 착시, 환영은 그림자로 인해 그 뚜렷한 실체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미지와 그림자, 실상과 허상,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이를 상호 내포적인 관계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이는 일종의 그림자놀이 혹은 환영놀이로서 나타난다.

투명한 아크릴판과 유리판에 이어 작가의 최근 작품에는 거울을 이용한 사각형과 입방체의 변주가 강조되고 있으며, 이로부터 환영놀이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때 동일한 소재를 중첩시키기거나 또는 여타의 다른 소재(예컨대 에칭 처리한 유리판과 뒷면을 부분적으로 갈아낸 거울)를 중첩시킴으로써 더 현란한 일루전 효과를 끌어내기도 한다.

한편 설치의 경향이 뚜렷한 작업들을 보면, 유리판에다가 각종 기하학적인 문양을 프린트(스텐실기법)하고, 이를 200-300도의 가마에 구워내서 착색한다. 이렇게 만든 유리판들을 벽면에다 수평이나 수직으로 설치하는데, 이때 설치되는 유리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일루전 효과가 커진다. 유리판에 착색된 형태와 색채가 벽면에다 일종의 색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유리판 표면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와도 같은(보기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현란한) 색채들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이처럼 이미지와 그림자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색 면들의 축제는 관객의 시점에 따라서(관객의 시점이 따라서 이미지가 다르게 보이는) 리드미컬한 내적 울림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일종의 상호작용미술에도 맞닿아 있음을 말해준다.

근작에서는 유리판들을 수평이나 수직으로 설치하는 대신에 사선으로 설치함으로써 일루전 효과에 일정한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근작에서의 특징적인 점은 유리판의 한쪽 가장자리에 치우치게 이미지를 프린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프린트된 면이 벽면과 일치하도록 설치함으로써 그 경계선을 기점으로 해서 벽면에 색 그림자가 생겨나게 한다. 그럼으로써 유리에 프린트된 이미지와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서, 연속된 입방체로서 보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원형의 유리판을 소재로 차용해서 형식상의 변화를 꾀하는가 하면, 유리판들을 각이 지게 중첩시켜(이를테면 지그재그 형태로) 마치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왜곡된 상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이 모든 작업의 이면에는 세계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놓여 있다. 임정은의 작업은 말하자면 일종의 본질주의의 한 버전에 연계돼 있으며, 이는 사각형과 입방체를 기본 모듈로 한 기하학적인 형태의 변주로서 나타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계의 근원형상은 사각형과 원형이다. 원형은 그 자체 닫혀져 있으면서 이와 동시에 무한대를 향해 열려있는 이중구조에 연유한 완전성 때문이며, 또한 사각형은 닫힌 체계에서 연유되는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각형은 가장 안정적인 형태이며, 사각형이 변주된 입방체는 세계의 모듈에 해당한다(이는 디지털이미지의 최소단위인 그리드 즉 격자구조와도 통한다). 즉 세계는 이 기본단위원소의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조합과 해체로 축조돼 있고, 이는 감각적인 세계(예컨대 집과 같은 입방체 형태의 각종 구조물)를 넘어 관념적인 세계마저 아우르고 있다. 더불어 그 관념은 기하학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학문이라는 신념에 잇대어져 있다. 이는 기하학이 감각적 경험의 소산이기보다는 그 자체 순수한 추상의 산물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조화, 균형, 리듬, 비례 등의 정통적인 미학의 규범들(흔히 그랜드매너 즉 위대한 양식으로 명명되는)은 하나같이 수학에 바탕을 둔 것들이며, 기하학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이로써 사각형과 입방체가 변주되는 다양한 지점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임정은의 작업의 이면에는 세계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깔려 있으며, 이로부터 일종의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질서의식으로서 감각적인 세계를 재편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근원형상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신념은 또 다른 근원적 존재인 빛과도 통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의 사각형과 사각형이 변주된 입방체가 순수한 형식 곧 관념적인 형식을 대변한다면, 빛은 이를 가시화하고 확장하는 감각적 형식으로서 현상한다. 즉 작업 속에서 빛은 형과 색을 낳고, 색 면과 색 그림자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이미지와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환영놀이의 원인이다. 빛이 아크릴판과 유리판의 투명한 소재와 만남으로써 이미지를 그 배후로까지 확장시키고, 거울의 반영적인 소재와 만남으로써 이미지를 자기 외부의 공간으로까지 확장한다. 이처럼 빛은 이미지의 변주와 이를 통한 확장을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경계에 대한 선입견마저 흔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미지(실제)와 그림자(허구)가 그 경계를 잃는다. 그림자가 비록 이미지의 흔적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의 작업에서의 그림자는 오히려 이미지보다 더 결정적이다. 평면이미지로 하여금 입방체로서의 실체감을 강화해주는 것도 그림자이며, 색 면과 색 그림자들이 어우러진 현란한 일루전 효과를 강조해주는 것도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임정은의 작업은 반영과 반사, 투사와 투과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같이 경계를 허무는 개념들이고, 자기 내부에 자기 외부를 끌어안는 개념들이다. 양가적인 개념들이고,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내포적인 개념들이다. 기본 단위로서의 하나의 사각형이 입방체로 확장되고, 그림자로 확장되고,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지시하기 위해 끌어들인 다중존재나 이중존재라는 주제의식은 이처럼 존재의 다의성을, 존재의 비결정성을, 존재의 열려진 구조와 그 생리를 가시화하고 있는 작업과 맞물려 상당한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 자칫 기하학적인 엄밀성으로 인해 기계적이고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작업에다가 빛을 끌어들임으로써 오히려 만화경과도 같은 이미지들의, 그림자들의, 색채들의 향연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고충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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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빛이 만드는 이야기” 포스코 미술관 2003년

아득한 옛날부터 빛은 질료 없이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영혼의 표식으로 받아 들여졌다. 빛은 어둠과의 대조를 통해 존재함으로써 낮과 밤, 선과 악,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시원의 상징이었다. 서구미술에서 빛을 자각하는 과정은 곧 세계와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해 가는 과정이었다. 빛의 밀도(密度)를 인식함으로써 화가들은 형태에 새로운 감수성을 불어넣었고, 빛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선과 면의 자율적 질서를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가들은 빛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찾는 대신에 개인적 존재의 메아리를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때 신()의 상징이었던 빛은, 대상을 파악하는 감각적 언어가 되었고, 독립적인 조형 요소가 되었고, 마침내는 미적 현실 그 자체가 되었다빛은 물리적으로 일종의 파동임에도 불구하고 입자(粒子)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빛은 물질과 빗물질 사이를 가로질러 존재한다. 빛은 또 공간의 영역인 동시에 시간의 흐름 속에 있다. 눈으로 분명 지각되지만 그 상태가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빛은 찰라 처럼 짧은 순간으로다가 오지만 시선과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시시각각 변주되는 감정의 파장을 만든다. ‘색 그림자를 이용한 임정은 의 작품은 빛의 원초적 아름다움과 시적인 공간감을 극적으로 느끼게 한다. ‘유리판화라고 할 만한 그 작품들은 얇은 판유리에 Serigraph(스텐실)로 색채를 프린트하여 색채를 입히고 유리가마에서 고온으로 구워내어 탄생된다. 흔히 작품에 유리에칭으로 불리는 모래 치기(Sandblasting) 기법을 활용하기도 한다. 그 기법들은 투명하면서도 섬세한 농담과 밀도를 만들어 낸다.

 

임정은 작품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으로 가장 안정된 형태인 사각형과 입방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을 하나하나의 단위로 보면 간명한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이루어진 평면들이다. 그 단순한 형태는 추상적인 질서로 다가오지만 집과 방, 건물과 도시 같은 일상적 생활공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엄격함에서 얻어지는 안정감과 은밀하게 폐쇄된 공간에서의 안락함을 암시하는 심리적 상징하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임정은 작품은 건축 적이다. 아마 빛이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지는 영역도 건축 공간일 것이다. 건축 공간 속에서는 빛은 시선의 각도와 신체의 움직임에 다채롭게 반응한다. 작가가 르 꼬르뷔제의 롱샹을 유독 좋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실제로 작가의 초기 작업에서는 그리드와 이방체 속에 건축이나 도시 삽입하기도 했다.

 

작가의 작품들은 빛과 그림자의 투사 각도를 고려하여 철저하게 계산된 의도에 따라 설치된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 중첩과 배열이다. 가령 이미지가 새겨진 여러 장의 유리판을 중첩시켜 두터운 평면을 만들거나, 수 십장의 유리판을 수직과 수평으로 일렬로 정렬시켜 벽면에 설치한다. 어떻게 보면 더 없이 간명한 설치방식이지만 그 단순한 공간에 빛이 개입되면서 섬세한 공간적 층위를 만들어 낸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모든 시공간적 Layer는 단순함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조명의 각도와 시선의 방향에 따라 빛과 그림자, 색채와 형태, 표면과 공간이 섬세하게 어우러지면 시시각각 변주되는 이미지를 만든다. 그 이미지들은 그림이자 그림자이고 허상인 동시에 실상이다.

 

‘Stain Glass’의 경우에는 빛의 이미지가 완강한 윤곽선 때문에 빛이 형태나 공간에 종속되어 있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은 순수한 색 그림자가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에 보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공간을 만든다. 그 공간은 빛과 색 그리고 공간의 상호교환을 통해 감성의 파장을 다채롭게 전이시킨다. ‘색 그림자들의 회절과 간섭이 연출하는 빛의 유희는 동화 속의 세계처럼 환상적 분위기로 다가오지만, 다른 한편으로 빛이 지니 원시적 속성을 건강하게 환기시킨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은 테크놀러지의 이름으로 도입된 인공적 광선의 현란한 효과를 보는 것과 달리 지각의 원초적 즐거움을 전해준다.

 

여기서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위상학적 변화다.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리드와 입방체들은 유클리드 적 의미의 기하학적 구성이 아니다. 그것은 평면이 3차원으로 전이되었다. 다시 다()차원으로 확산되는 위상학적 변화를 거친다. 그 차원의 변화는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적이다. 유리판에서 시작된 하나의 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고, 이미지를 바라보는 시점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작가의 언급처럼, 시선과 현상, 허상과 실제, 그리고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은 이분법적인 마주보기가 아니다. 그것은 짧은 순간에도 다채롭게 표출되고 무수한 양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감각의 내재적 가능성이다. 어떤 의미에서 시각의 명징성은 도구적인 것이고 편협한 이성 중심적 사고의 산물일 것이다. 원근법적 소실점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시각의 중심은 유일하기 때문에 특권화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단일하고 특권화 된 시선에 의해 세계를 균질적인 질서로 환원할 수 있을까? 임정은 의 작품에서는 물질과 빗물질, 표면과 심층이 상호침투하고 기하학적 엄격함과 환상적인 모티브라는 이율배반적 요소가 공존한다. 그 지층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장()이며 물질과 의식과 시선, 현상과 지각이 상호 침투하는 개방적인 세계다. 임정은의 작품이 가진 매력도 그 열려진 경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에 있다.

이동석 (전 부산시립미술관학예연구사, 1964-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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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과 지각 사이를 왕래하는 사유의 노마디즘(Nomadism) - 임정은(Lim, JeoungEun) 작품론 1

한 작가를 미술사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 결과로서 그 작가를 미술사 속에 입지시키는 것이 미술사학자가 담당해야 하는 하나의 과제이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특히 형식과 내용의 분화가 계속해서 다양해지고 있고, 장르와 스타일 사이에 분명한 한계선을 긋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현 상황 속에서 더욱 난해해졌다. 작가 임정은에게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지금까지 그를 향한 평론에서 논의된 것처럼, 임정은의 작품은 그것이 지니는 내용의 사변적 문제가 아니라 형식상의 논의로 귀결되기 때문에 현대미술의 형식주의에 비교적 가까울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다. 즉 모더니즘에서 그리고 그 이후로 구축되어온 형식논리로서의 예술성이 임정은의 작품을 해설할 배경이 될 것이라고 쉽게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 간단하지 않은지는 다음과 같다.

단토(Arthur Danto)를 비롯한 많은 예술비평가들이 주목한대로, 우리는 미니멀(minimal)이라는 극단에서 다시금 확장된 물질성을 보았다. 관념의 한계였던 원리주의로 수축되었던 의식과 태도들이 자체 밀집된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팽창한 결과이다. 평면성에 대한 반발이 즉물적 태도로 다시 복귀했다면,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모더니즘 미술에서 논의의 중요한 화두로서 작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임정은의 작품을 재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임정은 물리적인 존재성에서 순수한이미지로서 다시금 그 행로를 틀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임정은은 현대미술사가 지나온 과정상의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그 문제에 대해 그다지 큰 고민을 두고 있지는 않다. 물론 모든 작가가 자신의 시대에 환경을 만드는 사조에 대해 민감할 필요는 없지만, 임정은의 경우는 지나치게 개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가의 작품성은 다른 경우들과 비교 할만하다. 그러나 그 비교는 단순한 형식상의 비교일 뿐, 그 에센스를 비교할 정도로 근친관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만약에 형식유사성만을 가지고 비교한다면, 이전에도 필자가 시도했지만, 바자렐리(Victor Vasareli)에 가까울 것이고 때론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이 행한 근래의 모자이크 작업과도 비견된다. 지금까지 국내의 미술이론가들은 외국의 지명도 있는 작가들과 국내의 작가들을 비교하면서, 평가절하하거나 혹은 마치 그들과 어깨를 겨루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이와 반대로 한국적인 (이것은 대체로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것을 내세우면 민족적인 우월성에 자위하기도 했었다. 이 모든 평가방식에서 필자는 임정은을 예외로 삼고 싶다. 그것은 그가 비교할만한 형식을 보유하면서도 독창적인 방식 - 이 방식이 결코 우수하다고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 을 통해 작품의 언술구조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의 형식이 빚어내는 몇 가지 독특함에서 비롯된다.

 

1.

작품은 반사하거나 투과하는 물질성을 기반으로 한다. 유리, 거울이 주재료가 되어 만드는 이러한 형상구조는 물론 결과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그는 사실이라는 문제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접근한다. 반영과 투과는 현실의 물질계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현실계에 고정화될 형상의 구체성에 대한 반발도 아니다. 이것은 임정은에게 있어 회화성의 문제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형식으로 인해 서구의 근세미술가가 500년간 고심해온 문제를 너무나 순진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듯 보인다. 중세까지 빛에 대한 신비주의적 의식을 근세의 과학주의적 태도로서 해결하려는 노력, 즉 빛에 대한 광학적 탐구는 근세의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의의 장이었다. 여전히 그 과학성은 인상주의시대의 빛과 색에 대한 원리적 탐구를 거쳐 Op art의 병리학적 시각성에 이르기까지 그 논의의 유효기간을 연장하고 있고, 임정은의 작품은 그런 연장선 속에서 개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실험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임정은의 경우는 빛에 대한 중세의 신비주의와 근세의 광학적 인식이 맞닿아있는 경계선 사이를 왕래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감상이 진행되는 동안, 언급했던 두 개념들을 초극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신비주의적 개념은 유미주의와 결합된 유희성으로 바뀐다. 그리고 광학적 긴장관계 속에서 임정은은 다시금 인간의 시각현상이 갖고 있는 결함이자 환각의 원리인 착시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광학적 환각과 시각현상의 사실성 사이에서 우리는 현기증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다빈치(Leonardo Da Vinci)와 같은 근세미술의 선구자들이 주창했던 회화개념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그 환각의 사실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은 거울이거나 아니면 창이었다. 즉 물질성의 벽을 투과하는 일종의 가상적 세계에 대해 사실성을 부여하는 행위가 회화였고, 모더니즘에 들어와 그 물질성을 다시 회복함으로서 가상적 성격을 버렸다고 할 수 있는데, 임정은은 이러한 인식의 역사를 되돌리는 의도를 지녔다. 그는 가상성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회화적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한다. 즉 잃어버린 전통의 회복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시금 그는 전통 속에 함몰되지 않는 새로운 조형어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서는데, 그것은 그러한 전통 구조에 대한 유희적 태도이다. 거울과 유리는 환각의 층을 만들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실성을 투영하면서 이중의 환각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지금까지 내부에서 투사된 환각성만을 문제 삼았다면, 임정은의 환각성은 외부와 내부가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환각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작품은 바로 그 장소가 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원근법적 구조는 완벽하지만, 동시에 작가는 그것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아울러 기만적인가를 드러낸다. 이것은 작가의 이념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가 현대미술의 개별자적 태도를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이점은 약간 과장한다면, 유목민주의(Nomadism)가 만들어낸 사유의 탈지정학적 태도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원리를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모순적(paradoxical)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2.

임정은의 작업은 장식성을 취하고 있다. 그 장식성은 이미 고전처럼 되어버린 패턴을 되살리거나 일종의 질서를 찾으면서 나타난다. 평면작업이나 - 그에게 평면이란 용어가 어울리는 지는 필자에게도 분명하지는 않다 - 입체적인 벽 설치에서도 그는 기하학적 질서를 꾸준히 실행한다. 유클리드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과장된 이야기이다. 그의 기하학적 구조는 원래부터 장식적인 것이었다. 장식(Ornament)이란 개념이 질서를 의미하는 라틴어인 ordo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임정은의 장식성을 대신 설명할 수도 있겠다. 즉 장식은 어떤 질서에서 반복되고 그 맥락에서 구성되는 형상구조를 의미한다. 그래서 임정은의 기하학적 구조는 건축적인 추상적 구조와는 약간 다른 장식성으로 인하여 그 친밀감을 찾을 수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이 건축적인 공간에서 잘 적용되는 것을 보면 건축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의 장식성은 건축에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필자는 이미 그의 작품에서 도널드 저드(Donald Judd)와의 유사성을 언급했을 것이다. 그의 건축적인 질서로서 장식성은 고유한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건축과 결합했을 때 상부구조를 이룰 만한 것이다. 건축이 이루는 공간성 속에서 그의 작품은 빛을 발하지만, 작품들은 공간성을 왜곡하고 그 질서를 자신의 새로운 질서 속에 귀속시키는 힘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임정은 작품의 특징이 아닐까?

 

다시 장식이란 개념으로 돌아가 보면, 그는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창조로서의 질서(혹은 장식)를 추구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그의 작품은 대략 70%정도 그의 의도를 충족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장식으로 나타날 빛, 항시적으로 변화하며, 그러면서도 일종의 내적인 영속성을 지니는 이 장식적인 조형원리를 단순히 이차원이라는 구조 내에서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 장식의 질서가 약간은 진부해 보인다는 점이다. 거울작업에서 이루어졌던 비공간적 형상성은 이 장식적 질서 속에서는 너무나 단순하고, 환경에 순종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작가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유리판의 설치와 조합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고, 실제로 다양한 해법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까지 이차원적인 투영으로 결론지어졌다.

 

3.

작가의 형식에는 설치가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치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데에 비하면 작가의 설치는 일회적 전시성을 충족하면서 물리적 유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장점을 지닌다. 그것도 개별적인 작품과 총체적인 작품으로 분리와 종합이 가능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방식은 같은 조형요소로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미술의 경제성에 입각해 볼 때 탁월한 조형적 해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설치가 갖는 중요한 의미들을 타진해 보고 있다. 언급하였듯이, 작가는 작품의 다양한 전시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일반적인 작품이 가지는 일방적대화 혹은 감상 방식은 일종의 상호교류(interactive)적인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전시에서도 작가는 다양한 요소를 첨가하여 매번 다른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 이것은 물질적으로 고정된 모더니즘의 원리주의에 대한 반론으로서 여지가 있다. 변화와 조응의 관계 속에서 작품에 대한 오래된 관념, 즉 현대미술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있는 유일무이의 존재로서의 작품이라는 관념을 해체할만한 매우 발칙한 도전이 될 가능성이 작가에게 엿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입구에서 언급했듯이 반사와 투영이 이루는 가상적인 세계 속에서 작가는 회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또한 자신의 새로운 질서 속에 만들어진 개별적인 그리고 변화 가능한 세계 속에서 그의 활동영역을 구축해 놓았다. 작가 임정은은 어쩌면 현대의 어떠한 시류나 사조에도 어울리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개별성 속에서 내적 발전과 새로운 조형성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는 자신의 사조를 만들어낼 것 같다.

김정락(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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