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환영놀이
임정은(Lim, JeoungEun)의 유리작업은 크게 평면과 설치, 이렇게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먼저 평면작업에서 특징적인 점으로는 유리에칭을 들 수 있다. 압축된 공기와 함께 금강사를 분사해서 유리의 표면을 갈아내는 식의, 일명 모래치기 기법으로써 투명한 유리판에다가 기하학적인 형상을 새기는 것이다. 사각형을 기본 모듈로 해서 이를 입방체 등의 다양한 유형으로 변주해낸 형상들의 그 자체는 평면이지만, 거기에 적용된 에칭의 차이(이는 화면상에서 미묘한 명암의 차이로 나타난다)로 인해 형상들이 입체로 보인다.
작가는 이러한 유리판들을 일정 간격을 두고 중첩시켜 나가는데, 대개는 두 세장 정도를 겹치지만, 경우에 따라서 중첩되는 판의 수를 늘려 일루전 효과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때 유리판과 다른 유리판간의 간격으로 인해 그림자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표면 이미지와 어우러져 사각형의 변주를 강화시킨다. 이는 평면이면서 동시에 입체의 환영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그 이미지로부터 유래한 그림자가 겹쳐짐으로써 다양하게 변주된 사각형과 입방체들이 마치 무중력이거나 무한대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여기서 착각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까 착각, 착시, 환영은 그림자로 인해 그 뚜렷한 실체감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이미지와 그림자, 실상과 허상, 실재와 허구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이를 상호 내포적인 관계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이는 일종의 그림자놀이 혹은 환영놀이로서 나타난다.
투명한 아크릴판과 유리판에 이어 작가의 최근 작품에는 거울을 이용한 사각형과 입방체의 변주가 강조되고 있으며, 이로부터 환영놀이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때 동일한 소재를 중첩시키기거나 또는 여타의 다른 소재(예컨대 에칭 처리한 유리판과 뒷면을 부분적으로 갈아낸 거울)를 중첩시킴으로써 더 현란한 일루전 효과를 끌어내기도 한다.
한편 설치의 경향이 뚜렷한 작업들을 보면, 유리판에다가 각종 기하학적인 문양을 프린트(스텐실기법)하고, 이를 200-300도의 가마에 구워내서 착색한다. 이렇게 만든 유리판들을 벽면에다 수평이나 수직으로 설치하는데, 이때 설치되는 유리판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일루전 효과가 커진다. 유리판에 착색된 형태와 색채가 벽면에다 일종의 색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유리판 표면의 이미지와 어우러져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와도 같은(보기에 따라서는 이보다 더 현란한) 색채들의 향연을 펼쳐 보인다. 이처럼 이미지와 그림자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색 면들의 축제는 관객의 시점에 따라서(관객의 시점이 따라서 이미지가 다르게 보이는) 리드미컬한 내적 울림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는 작가의 작업이 일종의 상호작용미술에도 맞닿아 있음을 말해준다.
근작에서는 유리판들을 수평이나 수직으로 설치하는 대신에 사선으로 설치함으로써 일루전 효과에 일정한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근작에서의 특징적인 점은 유리판의 한쪽 가장자리에 치우치게 이미지를 프린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프린트된 면이 벽면과 일치하도록 설치함으로써 그 경계선을 기점으로 해서 벽면에 색 그림자가 생겨나게 한다. 그럼으로써 유리에 프린트된 이미지와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하나의 유기적인 덩어리로서, 연속된 입방체로서 보이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원형의 유리판을 소재로 차용해서 형식상의 변화를 꾀하는가 하면, 유리판들을 각이 지게 중첩시켜(이를테면 지그재그 형태로) 마치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왜곡된 상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이 모든 작업의 이면에는 세계의 근원적인 존재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관심이 놓여 있다. 임정은의 작업은 말하자면 일종의 본질주의의 한 버전에 연계돼 있으며, 이는 사각형과 입방체를 기본 모듈로 한 기하학적인 형태의 변주로서 나타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계의 근원형상은 사각형과 원형이다. 원형은 그 자체 닫혀져 있으면서 이와 동시에 무한대를 향해 열려있는 이중구조에 연유한 완전성 때문이며, 또한 사각형은 닫힌 체계에서 연유되는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각형은 가장 안정적인 형태이며, 사각형이 변주된 입방체는 세계의 모듈에 해당한다(이는 디지털이미지의 최소단위인 그리드 즉 격자구조와도 통한다). 즉 세계는 이 기본단위원소의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조합과 해체로 축조돼 있고, 이는 감각적인 세계(예컨대 집과 같은 입방체 형태의 각종 구조물)를 넘어 관념적인 세계마저 아우르고 있다. 더불어 그 관념은 기하학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학문이라는 신념에 잇대어져 있다. 이는 기하학이 감각적 경험의 소산이기보다는 그 자체 순수한 추상의 산물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조화, 균형, 리듬, 비례 등의 정통적인 미학의 규범들(흔히 그랜드매너 즉 위대한 양식으로 명명되는)은 하나같이 수학에 바탕을 둔 것들이며, 기하학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이다. 이로써 사각형과 입방체가 변주되는 다양한 지점들을 형상화하고 있는 임정은의 작업의 이면에는 세계의 근원적 존재에 대한 신뢰가 그 바탕에 깔려 있으며, 이로부터 일종의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질서의식으로서 감각적인 세계를 재편하고 재구성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근원형상에 대한 작가의 이러한 신념은 또 다른 근원적 존재인 빛과도 통하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에서의 사각형과 사각형이 변주된 입방체가 순수한 형식 곧 관념적인 형식을 대변한다면, 빛은 이를 가시화하고 확장하는 감각적 형식으로서 현상한다. 즉 작업 속에서 빛은 형과 색을 낳고, 색 면과 색 그림자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인이며, 이미지와 그림자가 어우러지는 환영놀이의 원인이다. 빛이 아크릴판과 유리판의 투명한 소재와 만남으로써 이미지를 그 배후로까지 확장시키고, 거울의 반영적인 소재와 만남으로써 이미지를 자기 외부의 공간으로까지 확장한다. 이처럼 빛은 이미지의 변주와 이를 통한 확장을 가능하게 할뿐만 아니라, 경계에 대한 선입견마저 흔들어 놓는다. 그러니까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미지(실제)와 그림자(허구)가 그 경계를 잃는다. 그림자가 비록 이미지의 흔적에 지나지 않지만, 작가의 작업에서의 그림자는 오히려 이미지보다 더 결정적이다. 평면이미지로 하여금 입방체로서의 실체감을 강화해주는 것도 그림자이며, 색 면과 색 그림자들이 어우러진 현란한 일루전 효과를 강조해주는 것도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임정은의 작업은 반영과 반사, 투사와 투과와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나같이 경계를 허무는 개념들이고, 자기 내부에 자기 외부를 끌어안는 개념들이다. 양가적인 개념들이고, 상호 관계적이고 상호내포적인 개념들이다. 기본 단위로서의 하나의 사각형이 입방체로 확장되고, 그림자로 확장되고,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을 지시하기 위해 끌어들인 다중존재나 이중존재라는 주제의식은 이처럼 존재의 다의성을, 존재의 비결정성을, 존재의 열려진 구조와 그 생리를 가시화하고 있는 작업과 맞물려 상당한 설득력을 획득하고 있다. 자칫 기하학적인 엄밀성으로 인해 기계적이고 관념적으로 흐를 수 있는 작업에다가 빛을 끌어들임으로써 오히려 만화경과도 같은 이미지들의, 그림자들의, 색채들의 향연을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고충환(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