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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호, 성곡미술관 twitter facebook

출생

1970, 군산

장르

설치, 미디어

홈페이지

Ryubi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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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영상스틸컷)_01, 2015

8채널 영상설치, 안락의자, 폴리에틸렌 비닐, 메탈등, 7min 1sec 외 7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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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호, 해 질 녘 나의 하늘에는

내 음악의 그물들은 하늘처럼 넓기만 하다. 나의 영혼은 상복 같은 네 눈동자의 기슭에서 태어난다.” -파블로 네루다

 

푸르른, 그렇게 짙푸른 저 하늘

 

이번 전시는 유난히 남다른 소회를 갖게 한다. 전시의 차분하고 진중한 분위기처럼, 푸르른 해 질 녘, 작가가 마음 썼을 그 하늘 아래의 어떤 심경들이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짙고 푸르기만 그 느낌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금, 이곳의 세상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이들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한 어떤 깊이 있고 아련한 마음들이 드리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무언가 마음 속 깊이 있는 것들을 향한 어떤 울림 때문이리라. 여기에 지금, 여기 우리를 둘러싼 저 낮은 곳들에 자리하는 이들의 애틋한 아픔들 또한 마음을 재차 공명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래 동안 작가를 옆에서 지켜보던 이로서, 작가가 고민했음직한 것들의 묵직한 무게와 그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유, 감성들이 묵직하게 다가왔기 때문인 듯싶다. 그동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들도 한 몫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를 위해 그동안 작가로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사유하고 고민하고 또 실천 해왔는지를 짐작케 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렇게, 짧지 않은 작업의 과정을 통해 길고 힘든 길을 걸어왔고 어느새 조금은 다른 몸짓으로, 그리고 완숙해진 자기만의 언어로 세상을 향한 조심스럽고도 진중한 말을 건 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어떤 우회, 그리고 여정

 

강철태양’, 젊은 날의 작가 유비호를 연상시켰던 날카롭고 분명한 이미지이다. 한없이 푸르른, 저 강렬한 태양의 이미지처럼 세계를 명징하게 밝히()는 분명하고 단단한 시각이자 태도로 기억한다. 그렇게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 세상 자체를 직접적으로 대면하려는 당당한 모습 속에서 젊은 작가로서의 날들이 엮어진다. 이어지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작가는 자신이 세상을 대하는 방편인 뉴미디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동시대의 고독하기만 한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삶을 드러내기도 하고, (몽유, 일주아트센터, 2002) 우리를 둘러싼 사회의 구조적 시스템을 빗댄 다채로운 풍경들을 제시했다. 구체적인 한국 사회의 권력 구조와 그 작동을 천착하되 이를 직접적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 매체의 특성과 한계를 염두에 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전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현실의 모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인 상상력, 그리고 사회의 이면에서 작동하는 비가시적인 시스템을 드러내려 했다는 면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Flexible Landscape, 스페이스 크로프트, 2009)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하되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직접적이지만은 않은 방식을 부단히 실험해고 고민했던 것이다. 저 거대하고 복잡한 사회와 접할 수밖에 없는 개인, 혹은 작가 나름의 고민과 분투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이러한 면모는 세상을 향한 지극히 내밀한, 거의 무위에 다름 아닌 개인적 실천을 통해 실험되기도 한다. 거시적인 사회의 작동과 구별되는 미시적인 개인의 실천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아보려 했던 것이다.(Extreme Private Practice, 쿤스트 독, 2010) 혹은 이를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단단한 구조를 돌파할 수 있는 실험으로, 자율적 참여자들의 퍼포먼스 형식을 통해 시도하기도 했다. 타의에 의한 강요와 규율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공조 네트워킹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적 실천의 가능성 또한 실험한 것이다.(공조탈출, 공간해밀튼, 2010) 이들 작업은 현실의 다양한 접면을 향한 시선만이 아니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다채로운 실천을 이어간 것으로 읽혀진다. 이러한 면모는 다시 한국사회의 모순적인 현실이 갖고 있는 상처를 직시하면서 좀 더 내면의 비가시적인 것들을 펼쳐내기도 하는데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흔적이 남아있는 DMZ 공간의 유령 같기만 한, 무언의 분위기를 가시화시키기도 하고, (두 개의 그림자, 예술기지 땅굴, 2012) 중심과 주변이 교차하고 있는 서울역 공간의 이질성과 아이러니한 일상성을 노숙자와 비둘기 떼들의 영상을 교차시키면서 전하기도 한다. (유연한 역사, 문화역서울 284, 2013) 이렇게 작가는 치밀한 통제와 규율로 작동하는 거대사회의 틈새와 이면에 자리하는 미시적이고 유동적인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화시켜왔다. 단순히 사회 시스템의 구조적인 차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사회적인 것들과 대면하는 개인의 불안한 심리와 모순된 욕망, 정서들을 포함하여 사회성이 내재화된 미시적이고 감각적인 개인들, 그리고 이를 대안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미시적이고 감각적인 실천에 대해 천착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 숱한 고민 속에서 보다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게 된다. 사실 거대한 사회의 어떤 가시성, 혹은 그 작동도 결국은 개인의 삶을 투영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작가 역시 이를 중심으로, 개인의 내면에서 움직이는 보다 근본적인 것들, 내밀한 실천에 대한 고민들을 이어간다. 이러한 측면이 두드러졌던 전시가 이전 전시인 'Belief in Art, 정미소, 2012' 이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의 작업들과는 무언가 다른 면모들이 돋보였던 이 전시를 통해 작가는 좀 더 완숙해지고 깊어진 세상에 대한 어떤 성찰, 작가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그 여정을 분명히 한다. 끝없이 펼쳐진 혹한의 광대한 러시아 대륙을 여행하면서 못내 느꼈던 스스로에 대한 깨달음 같은 것이었을까. 그것은 작가로서의 힘들기만 했던 자신의 길을 재차 확인하는 것인 동시에,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변치 않은,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작가로서의 믿음, 신념에 관한 것을 다지는 것이기도 했다. 특정한 방향성이나 목표지점을 좇는 그런 여정이 아니라 지난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흐릿한 미래라 할지라도 변치 않은 작가로서의 신념과 함께 하는 묵묵한 여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 지극히 나의 작가적 개인성찰을 보여줌과 동시에 다시 심기일전하여 머나먼 작가의 길을 계속 가고자 하는 나의 바람이 담겨진 행위이다.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지속적으로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고자 하는 나의 기대가 담겨진 작업이다.(작가의 말)"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작가의 내밀한 독백이자 고백처럼 다가오기에 무거운, 그러나 힘찬 울림을 전한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다각적인 시도 속에서 이러한 모습은 다소간 변화가 있었지만, 그 기본적인 위치, 곧 세상과 마주하는 그 생생한 접면 속에서 작가가 혹은 작업들이 자리하고 있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다만 그 접하는 방식, 혹은 깊이, 다양함에 있어 숱한 우여곡절의 시기를 작가 역시도 거쳐야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작가에게 있어 초심이라 할 저 강철태양의 밝은 존재는 여전히 자리하는 것 같다. 세상을 비추는 명증하고 분명한 시선은 물론 세월의 완숙함만큼이나 대지를 순환시키고 생성케 하는 영원한 동력으로서의 햇살과 온기까지 더해진 채로 말이다. 그 직접적인 날카로움을 벼르고, 다져, 유연하고 부드러움마저 살붙여온 것이다. 여기에 작가로서의 단단한 신념마저 더해, 좀 더 대지위에 굳건한 모습과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려 했던 것이 이번 전시가 아닌가 싶다.

 

해 질 녘 나의 하늘에는

 

작가의 작품만큼이나 아련한 슬픔들이 곳곳에서 들리는 시절들이다. 작가의 이번 전시는 그 낮은 함성들로 향한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곳곳의 그늘진 곳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시선을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뭇 그 외양의 느낌은 달라진 듯 하지만 오히려 그 분명한 시선은,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작가적 태도와 심정은 더 유연해지고 단단해진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현실사회의 구조와 그 현실적인 작동을 직접적으로 조준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의 미명하에 사라지고 있는 것들, 낡고 버려진 것들, 변두리로 끊임없이 밀려나 이질적인 시공간성으로 자리하게 된 것들, 그렇게 동시대의 이면에 자리하는 애달프기만 한 삶의 문제들로 향한다. 사실 모두 이 사회의 구조적인 것들과 연동된 것들이지만 더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들이며, 작가는 이들 구체적인 삶으로 낮은 시선을 드리운다. 미시적인 시선만이 아니라 이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자세 또한 이들 대상을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선다. 시선이 미처 닿지 못한 면들, 그 내면의 이야기를 향해 진정성 있는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가시적인 모순의 상황들이 굳이 도드라질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화려한 시각적 영상대신 대상을 향한 차분한 정조들이 짙게 배어 있는 이번 전시는 이들, 상처 입은 우리내 사람들, 그 슬픔에 대한 연민이고 그리움 같은 것들로 가득하다. 사회적 사실로서의 이들의 존재가 아닌, 자신의 삶을 짓누르는 무게감으로 인해 휘청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를 향해 부단히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 조심스럽고 신중한 작가의 마음씀씀이가 전시장 가득, 작품 곳곳에 묻어나온다. 그렇게 이들을 향해 부드럽지만 단단한 시선을 드리우면서, 이들 상처 입은 사람들의 그늘진 마음에 빛을 쬐여 주는 것이라 못내 토로하는 작가의 말은 얼마나 가슴 저리고 묵직하게 다가오는가.

 

작가의 전언처럼, 삶의 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는 작품들과 다르게 전시장의 분위기는 저 내리쬐는 햇살을 머금은 듯 전체적으로 밝기만 하다. 이러한 전시공간을 비추는 환환 인공의 빛은 전시장 말미에서 만나는 미술관 옥상에 설치한 진짜 햇빛을 담은 영상인 ‘Live Sun' 작업으로 다시금 어루만져 진다. 그 빛들 사이로 이번 전시가 자리한다. 그간의 세월 속에서 분명 사뭇 달라지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세상을 환히 비추는 저 (강철)태양으로 향하는 것만 같아 의미심장하다. 비록 삶이 저무는 태양 빛 아래 놓여있을지라도 우리를 여전히 존재하게 하는 그 온기만큼은 여전하기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시선은 이처럼 우리 내 삶, 저 낮은 곳에 자리한 것들로 향한다. 힘겨운 우리 삶에 대한 명증한 시선은 물론이려니와 낮은 곳에 자리한 이들의 숨결마저 닿으려 한 것인데, 이는 전체 전시공간의 구조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1층의 공간이 현재성의 측면에서 우리 내 삶의 어려움이 가시화된 이지적인 접근이 도드라진다면 2층의 공간은 좀 더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향한다.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현실의 애환과 아픔이 전해지는 공간을 직조한 것이다. 이 두 층의 공간이 하늘과 땅처럼 유기적인 전체 공간을 이루며, 마치 작가의 세상을 향한 사유의 공간이자 심적인 공간처럼 서로 맞물려 있다.

 

1층에서 만나는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는 보여 지는 이미지처럼 단지 현대판 고려장을 다룬 이야기만이 아닌 듯하다. 노인을 업고 우리 내 삶의 굴곡진 공간들, 산업화의 이면, 그 폐허와도 같은 공간 속으로 걸어가는 남자의 힘겨운 모습은 그 자체로 삶의 고단함을 느끼게 한다. 힘들고 쓸쓸한 여정임은 분명하지만 어떤 절망의 느낌과는 거리가 있다. 노인을 업은 채, 해질 녘 짙고 가녀린 푸르른 빛으로 환한 저 하늘을 길게 바라보는 어떤 시선들, 태도 때문일 것이다. 현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현존에 대한 어떤 고민들이 느껴지는 것이다. 현실의 직접적인 모순에 대한 고발이 아닌 그 힘든 삶의 현존에 대한 연민, 애틋함 혹은 그리움마저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 현실의 모순적인 구조가 아닌 그러한 구조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삶의 단단한 현존으로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어지는 작업인 풍경이 된 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비극적인 운명을 버텨내고 인내하는 삶의 태도는 그 미동조차 없는 굳은 모습으로 풍경마저 되어간다. 쓸쓸해 보이지만 동시에 결연해 보이는 그 뒷모습으로 인해 무언가를 향한 어떤 절실한 태도가 단단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어떤 인내이고 무엇을 향한 기다림이기에 시간의 흐름조차 가로질러 풍경처럼 되어버린 것일까. 작품 속 현자의 모습은 작가가 지향하는 삶의 어떤 태도일 것이다. 이러한 단단한 삶의 태도는 다시 나의 뫼르소의 고단한 삶 속에서 끝이 없는 오름을 지속하는 인물을 통해 반복되고 강화된다. 공간을 메운 거친 숨소리로 인해 그 힘겨운 삶이 그대로 전해오지만 이러한 모순된 삶에 대한 단순한 분노가 아닌 그 모순의 삶마저 긍정하고, 다시 무언가를 향한 지향성을 애써 담아낸 것 같다. 동시에 시지프스 신화의 그것처럼 인간 실존의 본질적인 물음을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한 작업이기도 하다. 이러한 실존의 면모들은 이어지는 작업들에서 재차 확인되기도 하는데, 안개 자욱한 새벽 바다를 바라보는 여인을 담은 안개잠은 실존의 차원이 삶의 어떤 지향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미지의 어떠한 대상을 향한 영원한 그리움으로 현재를 인내하는, 이 시대의 또 다른 도상, 풍경처럼 말이다. 그 실재의 움직임조차 부동의 이미지처럼 다가오기에 거대한 힘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존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를 어떤 지향성으로 인내하고 극복하는 모습 또한 가시화시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이들 무언가를 향한 그리움의 이미지는 단지 막연한 어떤 희구만이 아니라 동시에 현실의 구체적인 장소성과 결합된 것들이기도 하다. ‘망향탑’, ‘밀물’, '안개바다처럼 우리 현실의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장소성과 겹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숱한 어린 영혼들이 안타깝게 영면할 수밖에 없었던 저 깊고 너른 저 바다를 향한 구체적인 현실의 장소성과 분단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실향민들의 사무친 그리움으로 자리하는 망향탑의 존재는 단순히 어떤 역사적인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살아있는 현실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들 애틋한 정조를 자아내는 그리움의 모티브,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면서 전시의 전체적인 일관성을 부여하는데, 동선을 따라 그 느낌의 강도들이 마치 한편의 극을 보는 것처럼 리드미컬하게 감성의 폭을 건드리는 점도 인상적이다. 느리고 정적인 화면 전개로 긴 여운을 주는 영화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유독 사진과 동영상의 매체적인 차이가 따로 자리하지 않는다. 매체라는 한갓된 형식 자체에만 작품이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번 전시는 이처럼 전체적으로 시적인 정서들의 교감으로 인해 진중하고 차분한 느낌을 던져 주지만 동시에 이들 느낌들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모순과 함께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사회를 향한 작가의 시선이 한층 넓어지고 깊어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아픔이고 슬픔이되, 이에 머무르지 않는 삶의 혜안을 향한 작가의 진중한 시선과 태도들이 전해지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 시선과 태도들이 현실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같은 겉모습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곳을 향한 것임을 작품 곳곳에서 드러낸다. 이런 면모들을 직접적으로 경청할 수 있는 작업이 전시장 곳곳 낡은 모니터를 통한 이너뷰작업이다.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참사 유가족,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용산참사 생존자, 세월호 침몰사고 유가족, 대구지하철참사 유가족 등의 인터뷰를 담고 있는 이들 영상들은 이들 사건에 대한 직접적인 모순을 들춰내는 방향이 아니라 그 힘겨운 사회적 재난 속에서도 어떻게 힘겨운 삶을 이어가는지에 대한 생생한 전언들이다. 작가로 하여금 삶의 태도를 다시금 다지게 했던 작업이었다고 하는데, 어디 작가뿐일까, 그 힘겨운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삶을 어떤 식으로든 이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테니 말이다.

 

해 질 녘, 작가가 바라보았을 하늘을 다시, 생각해 본다. 뉘엿하게 자리한 태양만큼이나 삶의 그늘이 더욱더 짙게 드리운 그 시점, 우리 내 현실 속에 힘겨운 삶으로 자리한 이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과 태도가 더욱더 오롯이 전해지는 것만 같다. 거대사회의 권력이 짓누르는 숱한 상처와 무게감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계속해서 힘겨운 삶을 지속해야 하는 소외된 우리 동시대인들을 향한 이러한 진정성 있는 접근은 비단 작가의 미덕만으로 환원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는 이 시대의 모든 예술()의 동시대적인 역할, 특별한 존재이유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작가는 재차 되묻는다. 우리 내 숱한 이들이 여전히 가시밭길을 향해 묵묵히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예술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가? 이러한 시공간 속에서 예술가는 어떠한 태도로 이를 마주하고 판단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물론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내놓는 화답들만으로 이 모든 질문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고단한 현실의 삶에 대한 작가의 온기 가득한 시선들과 진정성 있는 문제의식만큼은 이에 대한 어떤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 여전히 질곡의 삶으로 가득 찬 이 힘겹기만 시대 속에서의 작가라는 존재의 역할, 그 의미 있는 실천의 모습들을 확인하게 된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그 가능성으로 내놓은, 거시적인 구조만이 아닌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사회를 향한 자재로운 감성적인 시선들과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따사로운 접근의 노력들, 그리고 우리의 현재적 삶의 모순이 갖는 실존성에 대한 미적인 실천들 말이다. 지는 태양 빛 아래서도 다시 그 한줌의 햇빛으로 온 세상을 비추려는 노력들은 결국 그 태양 아래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향한 어떤 따사로운 희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예술이 우리의 삶에 자리해야 할 어떤 각별한 존재 이유들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작가의 전언처럼 그늘진 마음에 빛을 쬐여주는 한 줄기 빛으로, 동시대를 함께 하는 작가로서, 스스로의 마음 속 깊숙이 품었을 지금, 여기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민병직(대안공간 루프, 바이스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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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호전: 해 질 녘 나의 하늘에는

우리 시대의 해질녘

한 시대가 끝나가는 것은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모든 시대의 끝은 음울하고 뒤숭숭하게 마련이다. 질서가 깨지고 폭력이 난무한다. 가장 불안한 것은 천륜과 인륜이 깨지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못 견딜 것은, 말이 본래의 뜻을 잃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말이 말 같지 않고, 사람이 사람 같지 않은 세상은 지옥이다.

힘있는 자들의 횡포를 갑질이라 말하고, 대규모 해고를 구조 조정이라 말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금자리에서 내쫓는 것을 개발이라 말하고,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한 경쟁이라고 말하고,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는 비정규직을 강요하는 제도를노동의 유연화라고 말하고, 가진 자들의 파렴치한 특권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물려 주는 것을 안정과 질서라고 말하고, 강대국의 논리와 풍습을 온 세계에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짓을 세계화라고 말하는 세상은 사회 정의가 죽고 이기심과 탐욕이 판치는 염치를 잃은 세상이다.

제우스와 질서의 신 아폴론은 물론, 광기의 신인 멋쟁이 디오니소스는 이런 세상을 벌써 버리고 떠났다. 심지어 영악하지만 사악하지는 않은 사기꾼과 도둑들의 신인 바람 같이 약은 헤르메스마저도 진저리를 치며 떠난다. 무자비하고 무시무시한 지하의 신 하데스도 이런 세상을 원하지 않아 악마에게 맡겨 버린다. 남은 것은 지옥보다도 더 지독한 세상이다. 희망은 없고 산다는 것이 고통이다. 이런 현실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불면증과 불안이 에리니에스가 파리떼들처럼 뒤쫓는다.

그런 불화와 불균형, 부조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특히 예민한 감수성과 의식을 가진 예술가라면 이와 같은 절망적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맞서야 하는가? 그는 남들처럼 쉽게 모든 것을 인정하고 무사안일주의에 안주할 수 없다. 한 예술가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옳다고 하는 순간 그의 미래는 끝장이다. 더 이상 아무 것도 창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술가는 현실 세계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작가 유비호는 균형이 깨지고 비율이 망가진, 그래서 조화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시대의 우리 사회를 담담하게, 하지만 슬픈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힘을 소진하고 더 이상 남은 에너지가 없어 속절없이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되살릴 방법은 없다. 마지막 빛으로 아름답게 서쪽 하늘을 비추는 석양을 그냥 조용히 배웅하면서 새벽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작가가 말하는 해질녘 하늘이란 기울어져 가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질녘의 애절한 모습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의 필수 조건은 좌우 대칭, 즉 균형, 그리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 사이의 이상적인 비율, 즉 황금 비율, 그리고 어울림, 즉 조화라고 보았다. 따라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균형을 잡고 비율을 조정하여 조화를 이끌어 내는 행위다.

유비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들 세계에 균형과 황금 비율, 그리고 조화를 다시 가져오고 싶어한다. 물론 이런 그의 바람이 그리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예술가의 직관으로 먼 훗날 자신의 시도가 결국은 성공할 것임을 느낀다.

작가 유비호는 구석지고 버려진 공간에서, 그리고 그런 장소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들의 모습에서 이 시대의 부조리를 본다. 이번 전시의 대표 이미지가 철거될 건물 폐허에서 다리 저는 중년 남자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소복의 할머니. 1층에전시된 떠도는 이들이 전하는 바람의 노래는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초고층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한 다리 저는 남자가 할머니를 업고 힘겹게 걸어 오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곧 철거될, 거의 폐허가 된 건물들 사이 골목을 지나무너진 담으로 둘러싸인 방에 도착하여 쉬는 동영상을 보여 준다. 이들은 도시 개발 정책에 밀려난, 존재하지만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줄기 보이지 않는 바람 같은 소외된 인간들이다.

전시장 2층으로 올라가면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다. 안개 속에서 처음 대면하게 되는 것은 태양을 실시간 촬영하여 전시공간에 빛을 끌인라이브 선(LIVE SUN)’이란 작품이다.깊은 상실감에 사는 이들에게 햇볕을 쬐어주려는 작가의 배려가 따듯함이 배여 있다.

뒤쪽에는 바위에 묶여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체념 속의 기다림을 표현한 풍경이 된 자()’라는 영상 화면이 걸려 있다. 현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폭거에 2000년을 이렇게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렸고, 끝내는 제우스를 이겼다.

안개가 자욱한 왼편 전시실에는 여섯 장의 스크린 위에 지게를 진 남자가 정상을 향해 묵묵히 산길 계단을 오르고 있다. ‘나의 뫼르소란 작품이다.이 작품 속의 남자는결국은 굴러 떨어질 돌을 산꼬대기를 향해 쉬지 않고 밀어 올려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 시시포스의 현대판 모습이다. 아무 것도 얻지도, 이루지도 못할 목표를 위해 한없이 노력하는 현대인들의 비극을 보여 준다.

전시실 맨 안쪽 벽 위에는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는 소녀의 뒷모습 영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안개 잠 포그(fog)’라는 작품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리는 인어공주의 모습이다. 소녀는 깊은 바다에 잠겨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고 만다.

2층 중앙 전시실에는 두 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망향탑은 교동도 망향대 입구에 위치한 이들 북한 실향민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쌓아둔 돌탑이다. 벌써 분단70년이다.‘밀물이란 제목의또 다른 사진 석 장은 201375일 태안 사설해병대캠프에서5명의 학생을 집어삼킨 새벽바다의 밀물을 담고 있다. 사진 속에서처럼 새벽 바다는 무심할 뿐이다.

2층 오른쪽 방에는 1990년대에나 볼 수 있었던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 여덟 대가 놓여 있다. ‘이너 뷰(inner view)’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씨랜드청소년수련원 참사’, ‘형제복지원 사건’, ‘용산 참사’, ‘세월호 침몰’,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춘천 산사태 인하대생 참사의 국내 대참사의 피해자와 생존자, 유가족들과의 인터뷰가 담긴 영상 기록들이다. 물론 아직도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참사가 있다. 작가는 정작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정부의 무능과 태만, 무책임 때문에 가장 어처구니없는 불행을 당한 이들의 지금의 삶과 마음 곳에 묻어 둔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는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해 묻고 있다.

 

예술과 아름다움, 그리고 예술가의 직관

유비호의 이번 전시의 분위기는 무겁다.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하면서 과연 이번 전시의 작품이 아름다우냐고 묻는다면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항상 아름다움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두둔해 주고 싶다. 아름다움의 조건인 균형과 황금 비율, 조화가 깨진 흉한 사회에 사는 예술가가 자신을 속이지 않는 한 어떻게 자기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시대에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은 오히려 한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사회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고 항의하는 것이 아닐까? 사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 고발을 하고 악과 투쟁하는 작가의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거짓된 겉모양의 번지르르함보다 아프고 괴로운 진실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예술가는 직관으로 이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내일을 예언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학자들은 사회의 병폐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대중이 반응을 하기 시작하면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서 문제 해결에 앞장선다. 그러면 언론이 이를 대대적으로 알린다. 그 다음에는 민심에 예민한 정치가들이 제도를 바꾼다. 모든 개혁과 혁명을 예술에서 시작된다. 그러기에 예술가가 직관으로 비판하는 문제를 외면하거나 무시하면 안 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이들 문제를 냉대하는 정도가 아니라 망각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의 직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필연코 파멸한다.

 

그리기와 찍기

유비호는 그리기를 포기하고 찍는다. 이 시대의 미디어인 동영상 화면으로 이야기한다. 오늘날의 현실은 그리기에는 너무 많은 악들이 이곳 저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지되어 있지 않은 화면을 응시하는 일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피곤하고 성가신 일이다. 하지만 영상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이나 조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강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 미디어 아트는 아직도 발전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예술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미디어 아트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한층 더 높여 놓았다.

유재원(언어학자, 신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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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유비호는 2000년 첫 개인전 강철태양을 통해 디지털 미디어 아트를 하는 젊은 작가로 급부상했다. 당시는 미술계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이 뉴 미디어’ ‘디지털 테크놀로지’ ‘IT산업’ ‘영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화두에 열광하던 때이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작가는 한창 새롭게 부상하던 멀티미디어 장치와 기술공학적 테크닉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활용한 영상설치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주목 받았다. 그러나 유비호는 점차 뉴 테크놀로지 및 뉴 미디어의 기술적이고 감각적인 이미지 효과보다는, 글로벌 자본주의 하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과 그 삶의 구조적 환경을 자신만의 사변으로 비판하고 그 내용을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미술 쪽으로 이행해왔다.

 

가령 그 사변은 현대 후기산업사회의 유연한 자본주의의 일상생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의 개인적 심리적 풍경을 자동차 경주 게임과 닮은 3D 애니메이션 막막하게 펼쳐진 사막 길을 달리는 동안 다국적 회사들의 광고판을 끝없이 마주치는 식으로 만든 디지털 영상작품 (2009)로 주조됐다. 또는 (2008, 2009)에서처럼 공영방송국 대형마트 글로벌은행 교회 백화점 아파트 등을 장난감처럼 모형으로 만들고 관객이 그것을 이리저리 새로 배치할 수 있게 하는 전시 형태를 취했다. 유비호는 유연한 풍경(2009)이라는 제목의 전시를 통해 개인의 삶에 다가오는 사회적 서비스는 언제나 친근하고 달콤한 이미지로 보이는 반면, 개인에게 위협을 가하는 부정적이고 해로운 면들은 쉽게 알 수 없도록 은폐되어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물론 작가가 비판하고 있는 그 같은 내용은 이미 문화이론, 사회학, 그리고 현대미술이론을 통해 이미 말해진 논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유비호의 작품들에서 비판적 발화는 현실의 비가시적 지점을 유머러스하게 들춰낸 내용을 담고 있고, 다양한 매체의 이미지로 유연하게 구현돼 표현의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특수성이 있으며 가치가 크다.

 

나아가 최근 유비호는 다른 사람들과 창작활동을 공유하고, 물질적 오브제로 남을 만한 작품보다는 일시적인 사건들을 조직해서 다양한 이들의 생각과 감각이 우발적이지만 생산적으로 교류하는 장을 탐색하고 있다. 그 예가 2010년 공간 해밀턴에서 가진 개인전 Mutual Escape이다. 사실 전시는 예술가가 아닌 일반인 9명이 참여해서 작가가 초기에 설정한 몇 가지 규칙을 따르되 각자의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일상을 탈출하는 방법을 터득해보는 일종의 워크숍 형태를 띠었다. 유비호는 이 전시를 통해 습관과 통념이 지배하는 대도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그 틀을 벗어나는 시도를 시작하도록 자극한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유비호가 일반인 참여자들의 퍼포먼스 과정을 스마트폰의 유스트림을 통해 실시간 생방송으로 내보낸 사실에 주목하자. 그 경우 우리는 Mutual Escape를 통해 또 다른 잠재적 탈출자들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를테면 미디어가 무엇인가를 매개한다고 할 때, 유비호의 워크숍과 인터넷 방송은 일상에서 해야만 하는 일과 그것을 벗어나는 일을 매개하고, 행위 하는 구체적 개인과 잠재 상태에 있는 익명들을 매개한다. 그렇게 해서 그 스스로 매체로서의 예술이 된 것이다.

강수미(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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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풍경들

INVISIBLE CITY

 

한가로운 도심 공원의 수많은 비둘기들이 퍼포먼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공원 매점에서 구입한 ACE 비스킷은 이들의 유혹하는 미끼이자, 퍼포먼스의 대가(代價)로 주어질 것이다. 연출자는 미리 점찍어 둔 위치에 카메라를 설치한 후, 비스킷을 손으로 잘게 부수어 공원 바닥에 글씨를 써내려간다. INVISIBLE CITY, 한자씩 스펠링을 써내려가는 동안 몇몇 대담한 녀석들은 그의 존재를 무시한 채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가 글쓰기를 마친 후 물러난 자리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아귀 같은 비둘기 떼에 의해 점령당한다.

 

서로를 견제하는 비둘기 떼의 극성스런 몸짓에 글씨는 완전히 가려진다. 게걸스럽게 식사를 마친 녀석들이 한두 마리씩 서서히 자리를 떠나면서, 희미하게 남은 글씨의 흔적들은 텍스트의 의미를 그럴듯하게 시각화한다. "INVISIBLE CITY"

 

현대의 도시가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치밀한 시스템의 꽉 짜인 매트릭스 속에서, 지극히 예측 가능한 패턴의 원초적 욕망을 쏟아내는 인간의 모습은 바닥에 뿌려진 비스킷을 향해 달려드는 비둘기 떼와 많이 닮았다.

 

 

AUTO-MOBILE LANDSCAPE

 

가상의 메트로폴리스를 재현한 미니어처 건물들이 나지막이 펼쳐져 있다. 육각형의 넓고 평평한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조그맣고 앙증맞은 파스텔 톤의 건물 모형들이 올망졸망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들은 바닥에 짧은 바퀴를 감추고 있고 언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Flexible Landscape1)  속 건물들은 정교한 스케일과 디테일을 지닌 건축 모형과 달리, 가장 특징적인 부분만 강조하고, 변형시킨 단순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각각의 건물을 꽤나 사실적으로 인식하는데, 이는 자신들의 머릿속에 무의식중에 각인된 브랜드와 건물의 형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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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도로 발달된 유연한 자본주의(Flexible capitalism)'는 첨단 정보 통신 기술과 노동 생산성의 지속적 증가로 인한 미국의 신경제 또는 신자본주의의 새로운 노동형태를 강조한 개념이다. 이 시스템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유연한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며,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새로운 시스템에 적응해야한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단순한 과거의 규제 철폐라기보다 국가의 통제와 지배를 벗어난 자유로운 자본의 흐름을 강조하며, 효율적인 인력 활용을 위한 새로운 통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세넷 지음, 조용 옮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문예출판사, 2001, pp.7-12




이들은 통신과 방송(KT, KBS), 백화점과 영화관(Lotte, MEGA BOX), 언론(조선일보), 아파트(現代)와 교회, 은행(한국은행) 21세기 한국 도시의 기능적 풍경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건물들이다. 이들은 1990년대의 세계적 경제 위기 이후 대두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금융과 자본의 무한한 자유흐름을 통해 거대화한 기업과 방송, 언론, 엔터테인먼트, 건설, 은행 그리고 종교2) 시설로, 한국의 도시를 장악하고 있는 대표적인 공간들이다. 이들은 현대사회 대중들의 무한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반영시키는 공간이자 소비와 유통이 최고의 가치가 된 유연한 자본주의의 상징적인 풍경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본의 흐름이 발생하는 공간이면 어디든 나타나는 대단한 유연성과 확장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공간의 맥락이나 역사성, 삶의 패턴과는 상관없이 어느 날 우뚝 솟아 모든 것을 평정하며, 시공을 초월한 무차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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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부 교회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의 혜택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인해 소규모 교회들이 사라지고, 대기업을 방불케 하는 거대 자본의 대형 교회들은 더욱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교회의 수입구조의 상당부분이 신앙심 돈독한 부유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헌금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대중들은 이들의 내뿜는 강력한 페로몬에 취해 자신의 현대적 삶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이들의 존재를 등극시킨다. 현대인은 이동 통신에 의해 무한 소통(or 무한 구속)의 자유를 얻었고, 스포츠와 쇼핑, 영화를 소비하며, 종교에 의탁하여 위안을 얻는다.

 

신자유주의 시스템 속의 개인들은 모든 것을 다 바쳐 끊임없이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동시에, 그들 앞에 다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 존재들이다. ‘소비하는 인간은 현대적 삶의 풍경을 구축한다. 개인의 완벽한 소비를 위해 친절한 시장(Market)’씨들은 24시간 어디에서든 동일한 서비스를 무한 제공해준다. 인간들은 편리함에 길들여지고, 서비스의 부재를 존재의 부재와 동일시하며, 현대적 삶에서의 박탈로 이해한다.

 

Flexible Landscape 너머에는 화사한 낙원의 도로를 재현한 싱글 채널 영상(Euphoric Drive)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관객들의 시선은 말끔하고 시원하게 뻥 뚫린 환상적인 도로(눈부신 레몬옐로의 따뜻한 빛이 충만한) 위로 미끄러지며 서서히 움직인다. 도로 위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으며,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광고판들이 스쳐 지나간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여 준다는(See the Unseen)’ 이동 통신사의 상큼한 광고판과 요즘 어떠냐?’는 친구의 질문에 답해줄 나의 자동차, 내 애인에게 보여줘도 전혀 꿀리지 않을 우리 아파트 광고가 스쳐 지나간다. 나는 도시인이며, 지금 이곳은 소비하는 나를 위해 베풀어진 극상의 공간이다.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도시의 문명들이 내 앞에 펼쳐져 있다. 환상의 드라이브!”

우리는 모두 세상에 취해있다. 21세기 기술자본주의 문명은 우리의 몸을 숙주 삼아 온갖 실험을 감행한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는 환각의 공간 속에서 끝없는 욕망을 발산하며 이 세계를 탐닉한다. 보이지 않는 시스템의 정교한 쳇바퀴에 발이 박힌 인간 모르모트처럼.

 

 

 

A BETTER TOMORROW?

 

광활한 핑크 빛 대지 위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다. 숨이 끊어진 듯 보이는 이 남자는 흰 셔츠에 검은 양복바지의 전형적이며 평범한 직장인의 모습이다. 무언가에 쫓겨 급하게 뛰쳐나온 듯 그는 맨발이다. 그가 탈출한 것으로 보이는 도시는 저 멀리 지평선에서 대폭발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섬광과 시커먼 연기를 뿜어대고 있다. 바로 몇 시간, 아니 몇 분 전 그와 도시는 하나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함께 종말을 맞은 비극적 사건의 이유는?

 

이 남자가 마지막 순간까지 꼭 쥐고 있는 작은 나무 막대엔 그가 일상에서 되뇌었던 낙천적인 생활신조가 새겨져 있다. ‘A Better Tomorrow’ 오늘 보다는 좀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현실을 버텨왔던 그였지만, 당장 몇 분 후에 벌어질 미래의 종말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을까? 인생의 최후를 이렇듯 허무하고 비참한 물음표로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어떻게 최후의 도시로부터 탈출했는지, 거대한 폭발의 폭풍으로 날려 온 것인지, 누군가 그의 사체를 유기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정체모를 한 남자가 불운하게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생을 마감한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화면의 왼편 대지에서는 짙은 농도의 점액 같은 유기적 형태를 지닌 검은 형상들이 유령처럼 솟아오르고 있다. 이 형상들은 실제 전시장에 입체물로 제작되어 설치가 되었다. 수십만 년 전 대지 위에 존재했던 수많은 생명들의 사체가 압축된 석탄 결정체나 원유의 진액처럼 보이는 이들은 세상의 모든 빛과 생명을 흡수하는 블랙홀과 같은 깊은 어둠을 지녔으며, 소멸된 생명체의 모든 기운을 압착시킨 듯 한 기괴한 영기(靈氣)를 뿜어내고 있다.

 

모든 빛을 흡수하는 깊은 흑색은 생명의 호흡이 막혀 질식된 사물의 농축된 형태, 파괴된 도시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 거대한 파도에 힘없이 휩쓸릴 것 같은 위태한 도시의 검은 실루엣(Fantasia)’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모두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낙관 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다 같이 죽으면 괜찮은것이 평범한 현대인의 삶이다.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만이 어제의 후회를 잊을 수 있다. ‘맹목적인 믿음은 팍팍한 현대의 삶을 위한 선물이다. 생명이 끊어진 자에게 내일은 없다. 살아남는 놈이 이기는 거다.

 

 

FLEXIBLE LANDSCAPE

 

유비호는 <강철태양>(2000), <몽유>(2001)전을 통해 SF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주목 받았다. 유비호의 작업은 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사회, 정치, 경제 환경, 자연 환경)과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다양한 조건과 물리적, 심리적 반응들을 시각화 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작업은 자신의 심리적 내면을 탐구하는 작업과 타인과의 협업을 통해 보다 직접적이며, 적극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대중문화와 예술의 적극적인 소통을 유도하는 공동 작업은 보다 유연하고,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인터넷 기반 다중 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거나, 영화와 TV 드라마 등 대중매체 형식을 이용한 작업, 여의도 공원, 안양 공공예술 프로젝트 등 주변 환경에 직접 개입하여 대중과의 소통을 시도한 작업들이 그것이다.

 

Flexible Landscape는 그가 체험한 일련의 사회적 현상들과 자본화된 도시의 보이지 않는 구조에 대한 고민과 시각을 반영한 작업이다. 유비호는 완벽한 외양의 현대 도시와 일상 속에 도사린 알 수 없는 불안의 일면을 드러낸다. 그가 제시하는 현대 도시의 유연한 풍경들은 그저 밝고 경쾌한 놀이 공원처럼 즐거움과 행복, 자유가 넘쳐나는 낙원이거나, 정체모를 재앙으로 순식간에 소멸 할 수 있는 위태한 존재의 모습을 함께 지니고 있다. 현실의 도시는 우리가 욕망하고 바라는 것만을 보여주는 신기루와 같다. 실체를 아는 이는 허무감을 느낄 뿐이며, 모르는 이는 환상을 꿈꾼다. 어쨌든, 가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예술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의 구조를 반영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예술의 이름으로 온갖 스펙터클과 판타지, 도발과 일탈의 욕망을 제시한다 해도 음악을 멈추고, 책을 덮는 순간, 전시장을 한발 나서는 순간,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 현실세계로의 회귀를 준비하는 정신의 방어시스템이 본능적으로 작동한다. 현실의 두려움은 예술의 존재를 애써 무시하게 만든다. 예술은 멀고, 현실은 너무 가까울 뿐이다.

이추영(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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