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Artist Project with Korean Art Museum
로그인  |  회원등록  |  English    Contact us

아티스트

Home > 참여작가 > 상세보기

photo

이문호, 토탈미술관 facebook

출생

1970, 서울

장르

조각, 설치, 사진

홈페이지

www.moonholee.com 

Facebook Twitter Google Plus Email

Innerview-1, 2015

잉크젯프린트, 85 x 65cm

이전
다음

시지각의 유희를 창출하는 반투명한 공간의 환영

관람 1. 사람 하나 찾아 볼 수 없고, 가구도 거의 없는 텅 빈 공간. 있는 것이라곤 계단과, , 기둥 같은 건축 구조물이나 의자 혹은 거울 뿐이다. 분명히 어딘가에서 익히 본 낯익은 풍경, 누군가의 침실이나 거실이나 작업실일 듯한 근대 건축의 내부를 보는 이는 약간 낯선 기분으로 바라본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 어딘지 모르게 뭔가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미묘한 불편함. 하지만 근대 건축 사진에 길들여진 관객은 사라진 사람도, 소품도, 색채도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음영이 드리워진 건조하고 단순한 근대 건축의 내부 풍경을 감상한다.

 

관람 2. 거울로 둘러싸인 텅 빈 무용 연습실의 풍경을 편안한 마음으로 관조하던 관객은 옆에 있는 조형물을 발견한다. 무심코 그 안을 들여다본 관객은 지금껏 자신이 보던 광경이 실제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모형으로 만들어진 미니어쳐 공간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있는 사진의 실물 같은 표면과 그 바로 옆에 현존하는 실체의 어설픈 외양이 주는 괴리는 관객을 경탄시킨다. 어쩌면 이렇게 진짜같이 보이게 찍을 수 있단 말인가!

 

관람 3. 빛이 떨어지는 공간의 형식미를 감상하던 관객은 모형을 발견하고 자신의 착각을 깨닫는다. 눈이 일으키는 착시의 트릭에 흥미를 느낀 관객은 사진과 모형을 번갈아 쳐다보며 본 것을 실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때 아까 거울이라고 여겼던 모형의 뒤로 지나가는 다른 관람자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것은...거울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지각의 투명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관객은 완전히 혼란에 빠진다. 내가 본 것이 본 것이 아닌 것이다.

 

위의 세 가지 관람 패턴은 이문호의 전시에서 가장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상황을 설정해 본 것이다. 관객은 이들 중 하나만을 체험하고 돌아갈 수도 있으며, 이 셋 모두를 동시다발적으로 혹은 단계적으로 경험할 수도 있다. 이문호의 작품을 바라보는 일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끊임없이 조우하는 것이다. 기억 속의 익명의 공간을 우드락 모형으로 만들어 사진을 찍는 작가는 눈속임이라는 전략을 이용해 현실과 유사한 환영의 공간을 창출해낸다.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며 만들어지는 환영들은 시지각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을 환기시킨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보게 되는 것인가? 그런 면에서 이문호는 유사 이래 시각예술의 제일 해묵은 과제를 다시 한번 건드리는 상당히 대담한 작업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시 세계의 대상을 대신하는 것을 숙명으로 하는 시각예술은 태생적으로 보는 이의 시각적 상상력(그것이 올바른 인지든 오독이든)에 의존한다. 어떤 이미지도 원형의 특정 국면을 재현할 뿐 대상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것, 본다는 행위가 항상 변형을 수반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하면 현실과 유사한 환영을 만들 수 있을까를 분투해온 시각예술의 역사 전체의 추동력이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도출된 문제들은 이문호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본다는 행위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나는가?', '환영을 일으키는 기제는 무엇인가?', '어떤 요인들이 지각에 영향을 끼치는가?', '사진이라는 매체는 여기에 어떤 작용을 하는가?'같은 의문들 말이다.

우리가 눈앞의 시각적 현상을 해석하는 근거는 우리가 아는 기존의 지식이다. 소위 말해 아는 대로 보게 되는 셈인데, 곰브리치는 이를 환영이 성립하는 첫째 조건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우리가 본 적이 없는 오브제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한 그것과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장님이 된다는 것이다. 지각(perception, 저기에 무엇이 있음을 감지하는 것)과 인식(cognition, 그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나지만 결코 동일하지 않다. 지각에서 인식으로 이행하는 과정에는 학습과 경험에 의해 습득된 지식이 개입한다. 즉 우리가 '저기에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각한 대상을 뇌에 저장된 기존의 정보와 비교해 '아마도 무엇일 것이다'라는 가설(추측)을 세우고 그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 탐색과 수정 작업을 거쳐 확증한 결과인 것이다. 지각 과정은 보는 것(seeing)과 아는 것(knowing)이 끊임없이 교환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결코 단선적이거나 명백하지 않다.

이문호의 작품이 문제시하는 것은 지각에서 인식으로 전환되는 바로 이 부분이다. 시각적 지각이 유도된 투사에 의해 얼마나 영향을 받는가, 환영 창출의 조건이 무엇인가가 그의 주된 관심사인 셈인데, 그의 의도는 과거의 화가들처럼 그럴듯한 환영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환영을 깨는데 있다. 관람자가 부지불식간에 만들어낸 환영을 자꾸만 미끄러지고 어긋나게 함으로써 그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은 환영을 지각하고 해석하는 바로 그 과정에 끊임없이 제동을 거는 이문호 작품을 완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다. 보는 주체로서 관객은 이문호가 만들어놓은 보기 게임(the game of seeing)을 수행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작가가 설치해놓은 착시의 기술은 감상자가 해석의 행위를 통해 이에 조응하지 않으면 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목전에 놓인 작품을 그가 지닌 선지식에 비추어 예상하고, 경험과 비교해 추측을 수정하는 지속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이때 보는 이는 자신이 마음 속으로 예상하고 있는 것을 보려는 심적 자세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식에 있어 오인을 불러 일으키는 원인으로 기능한다. 중립적인 건축 사진으로 인지하고, 그것이 모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거울에 비치는 것으로 알았던 풍경이 뒤로 뻗어있는 실제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일련의 과정은 기대가 번번이 배반되는 인식과 오인의 되풀이되는 엇갈림의 궤적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살펴보아야 할 것은 계속되는 지각의 미끄러짐을 만들어내는데 작품의 형식적 요소가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가 될 것이다. 그의 작품에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일차적 요인은 모형을 만들고 그것을 사진으로 촬영한다는 매체의 전환, 혹은 차원의 전환일텐데, 여기에는 단순히 '모형을 사진으로 찍었구나'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상당히 섬세하게 고안된 장치들이 포진되어 있다. 비슷한 방식으로 작업하는 토마스 데만트(Thomas Demand)와의 비교는 이문호의 특징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도움이 된다. 이문호와 데만트는 작업의 형식적인 특징이나 주제적 측면에서 여러모로 유사점이 많은 작가다. 재료(이문호의 경우는 우드락/데만트는 종이나 카드보드) 같은 세부적 측면에서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 모두 모형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최종 결과물을 사진으로 남긴다는 형식적 공통점을 보유하며, 인식과 오인 사이의 균열을 의도한다는 주제적 유사성도 공유한다. 이들이 갈리는 지점은 주된 탐색 대상의 차이로, 데만트의 경우 재현의 의미화 작용에 주목해 이를 야기하는 사회문화적 문맥과 여기서 형성된 고정관념에 집중하는 반면 이문호는 방점이 해독이 아닌 그 이전의 지각과정에 있는 경우로 시지각의 인지과정 자체가 주된 관심사다. 초점의 차이는 세부 형식 요소를 활용하는 모든 국면에 반영된다. 시지각이 대상을 인지하는 바로 그 과정이 탐구 대상인 이문호는 '본다는 행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이 과정을 방해할 수 있는 부수적인 요소들을 배제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작품의 출발점에서부터 발현된다. 미디어에 널리 유포된 유명한 사진을 모본으로 하는 데만트와는 달리 이문호의 표본이 되는 공간은 작가의 기억 속에 있는 것이다. 학교((2004))나 선술집(<1992 winter>(2004)), 무용연습실((2005)), ((2005))같은 공간은 실제에 뿌리박은 것이 아닌 기억이라는 관념에서 소산한 것으로, 공간의 구체적 성격이나 역사를 짐작하게 해주는 지표적 특성이 상실되어 있다. 의도적으로 특정 공간을 연상케 하려는 의도를 지닌 데만트의 경우 사무실, 주차장, 아카이브 등 해당 공간의 성격을 결정하는 소품들이 산재되어 있는 반면, 이문호의 기억 속 공간은 창문, , 기둥 같은 구조물 외에는 대개 비어있거나 최소한의 가구만 배치되어 있다. 기억이란 필터를 통과시킨 사진처럼 모든 것을 흐릿하게 동질화시키는 파편화의 과정이고, 이런 기억을 거친 공간은 현실의 구체성이 배제된 모호한 환영으로 나타난다. 색이 제거되고 사람이 빠져 단순화된 공간은 어디서 본 듯 하나 기묘하게 낯선 묘한 이질감을 자아내는데, 명료하게 파악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닫혀 있는 것도 아닌 이러한 반투명함(translucency)은 이문호가 창조하는 공간의 중요한 특징이다. 세부 정보가 삭제된 반투명한 공간의 모호함은 볼 내용을 제거함으로써 본다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한다. 즉 재현의 내용에 묻혀 평상시에는 감지할 수 없는 지각하는 나의 감각, 또는 알 수 없는 대상을 인지하는 과정을 표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문호의 공간은 실제에 기반한 것인지 아닌지가 그닥 중요하지 않으며, 현실에의 흔적이 제일 많이 묻어 있는 경우(<1992 winter>)조차도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실체하지 않는 듯한 환영의 냄새를 풍긴다.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은 에셔의 <상대성>(1953)을 재현한 (2006)에서 잘 드러난다. 이문호가 에셔의 이율 배반적인 공간에 흥미를 느낀 것은 그것이 단지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 제자리로 돌아오는 상하좌우가 비틀린 일그러진 공간을 보는 체험이 우리가 3차원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공포, 저것이 끝이란 걸 안다면>(2006)의 착시 효과는 거리를 감지하는 우리의 지각 능력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다른 정보의 도움 없이 그저 시각에만 의존해야 하는 관객은 통로의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실상 10m는 될 듯 싶은 복도는 사실 5m 남짓일 뿐이다.)

인지와 오인을 반복하는 이 시지각 놀이에서 사진이라는 매체의 역할은 막대하다. 통상적으로 사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는 진실성의 측면과 사진가의 의도대로 관점과 상황을 조작한다는 구성의 측면 모두를 지닌 양가성을 띤다. 여기서 적극 활용되는 것은 후자의 측면으로, 이는 다큐멘터리 사진 장르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이용하는 데만트와 결정적으로 갈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데만트의 경우 평범한 일상을 건조하게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진실성(여기에 사진의 내용이 특수한 역사적 사건임을 드러내는 텍스트가 부가되곤 한다)을 차용함으로써 사진의 의미가 외양과는 다르다는 인식의 균열을 만들어내는데 반해, 이문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와 환영을 모호하게 만드는 사진의 변형 가능성이다. 사진은 조명, 시점, 크기를 변화시킴으로써 실물 같은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매체다. 환영 창출 기제로서의 사진의 역량은 착시를 의도하는 이문호 작업에서 한껏 발휘되는데, 일차적으로 미니어쳐인 이문호의 모형을 실물 크기로 인식하게 해주며 보는 시점을 고정시켜 해당 장면이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장면을 연출한다. 여기에 적절히 가해진 조명은 착시를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제거된 단순화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어 실제와 같은 핍진성을 강화한다. 그 중에서도 보는 각도의 고정은 사진의 신뢰도를 얻는 결정적 장치로, 거울을 시각적 유희의 트릭으로 즐겨 사용하는 이문호에게 특별히 중요한 요소다. 거울은 고래로부터 완벽한 환영의 상징으로 작가는 거울에 비친 상처럼 보이도록 사물을 배치하고 각도를 조정해 오인을 유발시킨다. 이때 만약 보는 이가 몸을 움직여 시점을 바꿀 수 있다면 트릭은 금세 깨지고 만다. 사진은 거울 이미지처럼 보이는 최적의 각도를 포착해 이를 고착시킴으로써 이후에 벌어질 오인을 위해 환영을 일정 시간 지속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현실을 조정하고 통제하는 사진의 구성력은 이문호의 모호한 공간 속에서 빛을 발하며 완벽한 환영의 조건을 마련하지만, 역설적으로 관객에게 착각을 일으키는 것은 일정 부분 (제작 과정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사진의 진실성-실제를 담았을 거라는 믿음-의 측면이기도 하다.

기억이라는 혼성의 영역을 일차 통과하고, 모형이라는 몸을 얻어 잠시 실재하다가,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시 환영이 된 이문호의 반투명한 공간을 표류하는 일은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 무감각해진 우리의 시지각 능력에 대해 되돌아보는 관조의 계기를 제공한다. 인식과 오인을 반복하며 단계적 독해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거기에는 보고자하는 것을 투사하는 우리의 기대가 개입되며, 가시 세계를 담아내기 위해 도식을 창안하고 수정해 온 시각예술가들의 노력과 동일한 정도로 추측-검증-수정이 되풀이되는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지각 과정이 존재한다. 정적으로 보이는 관조의 공간은 관객이 시지각의 미끄러지는 유희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역동적인 게임의 장으로 화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시각예술의 기본이 되는 본다라는 행위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것을 권유하는 작가의 속삭임을 듣는다. 조금만 더 자세히 보세요. 생각과는 다를지도 몰라요. 한번만 더 들여다 볼래요. 여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냐가 이문호의 전시를 즐기는 키워드일지도 모른다.

문혜진(미술이론/사진이론)

더보기

이문호 사진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Picture: Neither A Nor B

이문호의 작업 속에서 사진과 조각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관객은 이제 사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각일 수도 없는 어떤 모호한 지점에서, 현실도 아닌, 그렇다고 상상이랄 수 만도 없는, 어떤 누군가의 (내것도 아니고 다른 이의 것도 아닌) 경험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경험들은 그러나 사진 찍혀지지 않았으면, 그리고, 그보다 먼저, 제작되어지지 않았다면, 절대 마주설 수 없는 어떤 기이한 (한없이 깊어지는 복도, 무한히 반복되는 계단, 절간의 살인사건 혹은 장기적출의 현장 등과 같은) 순간들로서, 여기서는 시간도, 중력도, 사물을 보는 방식도, 그리고 사물들에 대한 지식도, 저 바닥을 알수 없는 계단의 아래로, 한없이 깊어지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이내 가라앉아 묻혀버리고 만다. 그 무엇도 아닌 것,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것,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경험조차 무엇인지 물을 수 없는 것, 이것이 이문호의 사진이며, 또한 사진 그 자체이다.

사진이란 그런 것이다. 사진은 삼엽충의 화석처럼, 이제 더이상 삼엽충도 아니고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돌이 되었다), 그렇다고 단지 그것의 재현일 수만도 없는 (가령 삼엽충의 화석이 단지 그것의 모형만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하여, 이것이거나 혹은 저것(either A or B)이라기 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neither A nor B)이다 (Walter Benn Michaels, “Photography and Fossils” (사진과 화석, 2007) 중에서). 그러니 이제, 이문호 작가에게 이것이 사진인가, 조각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은 그만 두어야 겠다. 왜냐하면, 이문호는 이 사진인것 같기도 하고 조각인 것 같기도 한 작업들 속에서, 둘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사진 고유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 사진에 고유한 이야기란 어떤 것인가?

 

Memory of the Rooms

그것은 역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르트에게도 그러했듯, 이것은 사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진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어떤 기억에 대한 것이며, 그리하여, 이 사진의 현상학, 사진의 노에마 속에서 그 기억은 나의 기억인 동시에, 한 존재를 저 대지로 부터 일깨워 세상속에 세우는어떤 계기가 된다) 이 기억은 먼저 이문호가 대학 시절 가끔 들리곤 했던 상수동의 반지하 선술집(그는 그곳을 아줌마집이라고 불렀다)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들로부터, 그가 독일 유학시절 지냈을 법한 건물 복도나 계단의 기하학적 유희들, 그리고 최근작에서 볼 수 있듯, 어떤 수상한/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던 뉴스 사회면 속의 현장들과 같은, 보다 공적이고 개념화된 공간들로 이어진다. 이문호는 이 공간에 대한 기억들을 정성스레 다듬고 붙여 현실 속에 재 조립해 놓음으로서, 이들을 의식으로부터 현실로 다시 소환해 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기억의 소환이 대개 어떤 들 속에서 일단락 지어진다는 점이다. ‘으로의 소환, 이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모태적 불안과 공포를 재환기시키고 내면화하는 이문호 사진의 어떤 무의식적 동기를 발견한다.

방이란 부엇인가? 방은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는 곳이며, 동시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다시 돌아와 눕는 곳이다. 방은 사적이며 일상적인 공간인 동시에,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재생하는 마술적인 공간이다. 방은 무언가를 품어 보살피는 곳이며, 또한 버리고 감추는 곳이다. 방은 이처럼 양가적이며 부조리한 곳인데, 그러나 이 부조리함은 방이란 것이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 일때는 거의 드러나지 않다가, 우리가 더이상 방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다시 말해, 방과 나 사이에 어떤 절대적 거리가 생겼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방과 나 사이의 절대적 거리, 이것은 우리가 모태적 불안(어머니의 자궁으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불안감)을 재경험하는 기회이며, 우리를 어떤 극복할 수 없는 좌절과 공포로 이끈다. 이문호의 방들로 부터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정서는, 근작에서 더욱 선명해진 피와 폭력에의 암시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이 갑작스러운 거리감, 즉 방이라는 일상적 공간을 일순간 너무나 낯선 곳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문호의 방법론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떼어내어 저 차갑고 어두운 불안의 심연으로 몰아가는 이 절대적 거리란 언제, 어떻게 생기는가? 무엇보다, 우리는 이문호가 그의 박물지같은 기억들을 재조립하는 지난한 과정으로부터 한 단서를 발견한다. 그는 의식으로부터 얇은 막 한장을 져며내어 (이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것의 상이다), 그것이 눈에 (그리고 카메라에) 보이는 그대로 (존재하는대로가 아닌) 입체화 하는데, 이것은 오직 하나의 방향을 향해 제작된 일종의 연극무대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 무대는, 모든 연극의 무대가 반드시 그러하듯, 그것과 그것을 보는 이들 사이에 어떤 거리를 상정하며, 관객을 일종의 대립항으로 만든다. (객석은 무대와 분리되어지며, 어둡다. 배우는 관객의 존재에 대한 철저한 망각을 통해 연기의 진정성을 확보한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거리, 연극에 고유한 이 거리는, 서로를 보여주고,’ ‘보는관계로 만드는 가운데, 그 안에서 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현실만도 아닌 어떤 마술적 상황으로 서로를 밀어내고, 또 부른다. 이것은 연극에 고유한 역설로서, 이를 통해 우리는 배우가 (혹은 속의 물건들, 사태들이) 오직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말들을 엿듣게 되거나, 따라 읇조리게 된다. 요컨데, 이문호의 방들은 오직 한 방향에서 보여지기 위해 제작된 극장의 세트이며, 이 속에서 관객은 그 방들을 보도록 저만치에 위치지워지는데, 이 거리로 부터 우리는 타인의 삶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거나, 우리 자신의 삶이 저 제작된 삶 속으로 용해되어가는 것을 섬뜩한 느낌으로 목도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서로 다른 두 존재가 각자 서로의 존재에 대한 거리 속에서, 그리고 서로의 역할에 대해 모른체하는 가운데, 상대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연극적 역설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문호는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 연극적 공간을 다시 사진찍는데, 이 사진찍기로부터 우리는 연극적 대면의 또 다른 단서를 발견한다.

 

Picture as a Supreme Fiction

Jeff Wall의 첫번째 전시회를 기억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가 사진으로 무엇을 성취했는지. 그는 방을 만든 다음, 그것을 발기발기 찟고 부순 뒤, 사진을 찍어, 거리의 쇼윈도에 걸어두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그저 한 장의 사진인지, 아니면 어떤 파괴된 방에 대한 광고(지시)인지 분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혼동, 실재와 재현 사이의 이 구분할 수 없음, 이것은 사진 이전에 회화의 욕망이었으며, 이 욕망으로부터 사진은 태어났다. Wall은 사진으로 그림을 흉내내는 일을 그만둔 대신, 사진의 근본적인 욕망으로 사진을 되돌려, 사진이 가장 사진스러운 가운데, 사진의 예술을 만들어내었다. Tableau Vivant - 이것은 사진의 개념이 아직 존재하기 전에 사람들이 실재를 불러와 즐기는 방식이었으며, 따라서 Wall의 사진(Tableau)은 회화의 연장이 아니라, 예술의 어떤 근원적인 욕망의 구현이다. 이문호의 제작술과 사진술의 병합은 바로 이 Jeff Wall 적인 전회, 즉 사진이 현실의 충실한 기록이라는 믿음과, 사진이 회화의 가장 진보된 도구라는 믿음, 이 두가지 오해를 이중부정하면서 사진이 무엇인가를 재정의하는 전환적 방식 위에서 작동한다. 다시말해, 이문호에게 사진 찍기란, 어떤 방의 기록도 아니고, 그 제작된 방의 2차원적 재현도 아닌, 바르트의 표현을 빌자면, “온갖 부재한 것들이 다시금 몸을 얻어 자신의 현존을 외치는 마술적 무대인 것이다. 이 마술적 무대 속에서 우리는 이미 과거의 것들이 되어버린 것들과, 존재할 수 없거나, 존재한 적인 없는, 혹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온갖 불가능한 존재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 사진적 마주함은 다시말해 더욱 정제된단계의 연극적 대면으로서 (the Supreme Fiction, 마이클 프리드의 최근 사진 이론 중에서), 이 대면을 통해 우리는 이문호의 제작된 방들 속에서 아직 모호한 형태로 부유하던 것들이 사진찍힘을 통해,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 사진의 그 강력한 현전적 환기(“there-has-been” 사진은 언제나 어딘가에 있었던 무언가의 사진이라는 각성)를 통해, 비로소 현실에 발을 붙이는 과정을 목격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살인사건, 영아유기, 장기적출이 난무하는 이 지옥도 같은 세계를 단지 볼 뿐만 아니라, 그 세계 속으로 안내되어지며, (퍼어스에 따르면, 사진인덱스(index)란 바로 이 이끌림의 개념을 담지한다. 즉 인덱스로서 해변에 찍힌 사람의 발자국은 사람의 흔적임과 동시에 우리를 바로 그 사람으로 이끄는 신호인 것이다), 그 속에서, 그것을 저지른 자들과 (혹은 당한 자들과) 동일한 질량의 죄의식과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From Knowing to Seeing: a call for a new spectator

바로 여기에 이문호 사진의 반가운 성취가 있다. 그는 사진을 현실의 충실한 복제라는 사회학적 강박, 그리고 회화의 종착지라는 미술사적 강박 모두로부터 분리시킴으로서, 그 두 강박적 태도 속에서는 절대 담을 수 없었던 현실의 어떤 측면들, 즉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현실 속에 은폐된 비현실적 사실들과 그 비현실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실의 모습들로 우리를 소환한다. 작가 스스로도 잘 인식하고 있듯이, 이 방법은 본다” (seeing / viewing) 안다” (knowing) 사이의 저 심원한 플라톤적 오류에 대한 예술적 각주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플라톤은 그의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인간을 태어날 때부터 동굴 깊은 곳에 묶인 바, 입구의 횃불이 만든 그림자를 보면서태양의 반영이라 잘 못아는인식적 오류에 언제나 취약한 존재로 규정한 바 있다. 따라서 그는 앎을 봄으로부터 분리 시킴으로써, 혹은 앎과 봄 사이에 어떤 부당한 위계를 세움으로써, 그의 예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문호는 그러나 다시금 우리를 이 횃불로, 그것의 그릇된 그림자로, 그리고 다시, “보기(seeing)”로 안내한다. 왜인가? 그것은 우리가 이미 수천년간 경험해온 플라톤적 (knowing)”의 모순에 대한 한 예술가의 통찰이며, 이 시뮬라크르의 사회 속에서 우리 모두는 언제나 저 동굴의 죄수일 수 밖에 없다는 각성, 따라서 동굴 속의 우리는, 저 다다를 수 없는 동굴 밖의 사태가 만들어낸 이 환영들을, 비록 그것이 불안과 공포로 우리를 이끌지라도, 주시해야 한다는 요청이 아닐까?

 

저의 사진들은 ‘‘나는 누구인가’,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원초적 질문으로 좀 더 심층적으로 유도하려 합니다. 그러한 질문들을 통해 대상과 나 자신, 그리고 주변의 상황들을 돌아보고, 그에 대한 가치를 짐작해보자는 것입니다. 우선은 어떠한 상황의 제시인데, 첫 번째로 그것은 불안’, 혹은 두려움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여 제시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불안두려움의 원인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고, 그러한 감정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제일 큰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관객을 낯설고 불편한 상황, 혹은 경외의 순간으로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멈추어 생각하게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시각적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인터뷰중에서)

 

이문호의 사진은 그리하여 어떤 역설이다. 그는 지식에 내재한 모순을 재 모순화 하며, 우리 스스로 그 지식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보기로 우리를 이끈다. 보기란 것은 그러나, 최근 작의 엽기적 상상에서 볼 수 있듯, 불편하고, 불안하며,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이 두려움, 불편함이야 말로 우리를 멈추어 생각하게 만드는,” 그리하여 우리를 우리 사회의 가장 내밀한 영역까지 다다르게 만드는 새로운 관객(The new spectator) 개념의 동력이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이문호의 사진이 스스로의 미학적 성취에 대한 양보나 절충없이, 동시에 어떤 주목할 만한 정치적/사회적 통찰을 이루고 있음을 반갑게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최종철(현대미술이론)

더보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