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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포스코미술관

출생

1974, 서울

장르

조각, 설치, 미디어

홈페이지

www.kimbyoungh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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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_강정하 기획
참여작가
김병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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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병호는 산업화 과정을 거쳐 모듈화된 조각과 설치라는 독특한 작품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빛의 움직임, 에너지, 파장 등 보이지 않는 존재에 관심을 갖고, 인간의 삶과 사회구조를 반영한 작업을 한다. 여기 어둠과 빛 사이를 부유하며 공간을 압도하는 작품들이 무언의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차가운 금속성을 지닌 수백 개의 파이프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공간을 장악하는 ‘Aero-interface(2012)’, 3D 프린터를 무작위로 정지시켜 새의 몸체 중 일부만 출력한 후 이를 거울 사이에 배치한 ‘Active Layer(2014)’, 실제 놀이터나 정원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색을 알루미늄 봉에 칠하고 무작위로 추출, 조립, 배열하여 정원의 모습을 형상화한 ‘Garden(2015)’까지 김병호는 금속 조형물을 통해 사물과 현상의 이면을 포착해 낸다. 정원은 한 사회와 시대의 생활문화와 가치체계 및 예술이 총체적으로 결집된 장소이다. 그의 정원은 이렇게 인간의 삶을 구성해 나가는 요소들이 모듈화 되어가는 현상을 시각화한 작품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개개인 역시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모듈화 되어있는 세계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예술이 갖는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고 사회, 정치에 대한 관심과 관조를 통한 관계 속의 조화를 추구하며 동시대 사회구조를 투영하고 있다.

A System

이 글은 김병호의 조형물/생산품의 주요 특징을 간략히 기술하는 일종의 제품 설명서에 해당한다.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는 이번 전시 ‘A System’의 취지에 맞춰 작가의 작업 전체를 일별하는 개략적 설계도를 제시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설명서의 세부 항목들은 김병호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로, 교차하는 여러 요소들이 만났다 흩어지는 결절점, 곧 노드(node)에 해당한다.

 

0. 제품/오브제

하나같이 완벽하게 마감된 표면을 지닌 번쩍이는 대형 금속 조형물. 김병호의 작업에 대한 첫 인상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잘 어울리는 전형적인 고급미술의 오브제다. 하지만 "내 작업의 결과물은 제품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는 작가의 말은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과연 무엇이 실제에 가까운가.

작업이 제작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제품'이라는 작가의 말 쪽으로 기울게 된다. 작품의 제작 도면은 건축 설계도를 연상시킬 정도로 치밀하고 철저하다. 착상 드로잉에서부터 설계 스케치, 전체 구조도와 세부 도면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모든 부분은 수치화, 계량화, 규격화되어 제작 매뉴얼로 제시된다. 이 설계도는 조형물의 디자인에서부터 전자음을 내기 위한 배선, 설치를 위한 하중 안배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구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실제 제작 역시 작가의 수공이 아닌 공장 주문 제작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작가가 설계한 부품들은 제작 도면에 따라 산업 규격 체계에 맞춰 엔지니어에 의해 정교하게 가공되고, 작품에 도색이 필요한 경우에도 공업적으로 처리(애노다이징(anodizing))된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부품은 매뉴얼대로 설치되어 전시되며, 이때 소리 역시 부속품의 하나로 작품 안에 조립되어 들어간다.

작품의 설계는 작가가 하지만 실제 제작은 공장에 맡기는 이러한 작업방식은 1960년대 미니멀리스트들의 전략이기도 하다. 구상과 제작의 이원화는 실상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이 자전거 바퀴와 병걸이, 변기를 통해 이미 실험했던 것이지만, 김병호의 작업은 레디메이드보다는 미니멀리스트들의 그것과 좀 더 친연성이 있다. 이미 기성품으로 완성되어 판매되는 산업생산물을 '선택''명명'함으로써 상품을 예술품으로 전환시킨 뒤샹의 전략이 순수한 개념 차원의 문제제기에 가까웠던 반면, 미니멀리스트들은 훨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작가는 직접 손으로 작품을 형상화하는 생산자도, 주어진 사물을 예술로 임명하는 명명자도 아닌,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제작을 지휘, 통제하는 현장 감독의 역할을 수행한다. 김병호가 선택한 행보 역시 정확히 이 지점에 위치하는데, 다만 그의 경우는 단순히 제작만 공장에 맡긴 미니멀리스트들의 경우보다 외형으로나 태도로나 훨씬 더 산업 생산물의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그저 네모반듯한 입방체일 뿐인 도널드 저드의 큐브와는 달리 김병호의 작업은 유려하게 흐르는 선과 매끄러운 마감으로 산업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뿐더러 실제로 소리를 내며 작동하는 기계기도 하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예술사진이 아닌 제품 사진의 맥락에서 작품을 촬영하는 것은 이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대상을 가장 완벽한 상태로 제시하기 위해 그림자를 최소화하고 표면의 물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갤러리에 전시된다는 제도적 측면 외에도 조형물 자체가 지닌 몇몇 속성이 김병호의 작업을 완전한 제품으로 읽기 어렵게 만든다. 우선 상품의 일차 조건인 실용성이라는 면에서 김병호의 작업은 불충분하다. 산업 생산물의 형태는 기능을 위한 목적성을 지닌 것인 반면, "세상에 없는 형상"(작가)을 한 김병호의 생산품들은 실용성이 없으며 목적 없는 형태들이다. 더욱이 자기 자신으로 완결된 폐쇄 형식을 지닌 통상의 산업 생산물과는 달리 김병호의 조형물들은 설치를 통해 주위 공간까지 자신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난반사되는 표면을 통해 유발되는 환영과 착시 효과는 몰입과 관조라는 신체적, 정서적으로 고조된 감각을 야기하는데, 이는 산업이 아닌 예술의 영역으로 김병호의 작업이 실상 제품과 오브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1. 기계/()기계

다수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일정한 운동에 의해 유용한 일을 하는 동적 장치를 기계라고 정의한다면 김병호의 작업은 기계이자 비기계라 할 수 있다. 우선, 산업 제작된 부품으로 구성되고 작동한다는 점에서 김병호의 조형물은 기계다. 이는 단순히 작품의 외관이 아닌 제작 방식과 작가의 예술관의 차원까지 아우른다. 그의 기계가 생산해내는 기능은 청각의 영역인데, 여기서 인간의 관여는 최소화되고 기계 자체의 공학적 역량에 따라 소리가 창조된다. 작가의 프로그래밍에 따라 아르두이노(Arduino) 플랫폼 보드는 템포와 길이, 주파수를 변화시켜 소리를 만들어내고, 이렇게 만들어진 소리가 피에조(Piezo)라는 장치를 통해 나온다. 이때 소리가 부딪치는 접촉 매질이 무엇이냐에 따라 기계음의 질감이 변화한다. 한편, 전자기판에 집적화된 전기적 진동(소리)을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물리적 외형 역시 기계적 메커니즘으로 제작된다. 김병호의 모든 조형물은 용접이 아니라 개별 부품들의 조립을 통해 만들어진다. 선반 기계로 깎아낸 정밀한 부품들은 설계도에 따라 결합되며, 전시가 끝나면 역순으로 해체되어 보관된다.

제작에서부터 운송, 보관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인 시스템 구축을 지향하는 작가의 태도는 비단 물리적 영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미학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나팔꽃 모양의 조형물이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미학적 고려라기보다 기술적 발달의 결과다. 이전까지 별도의 컴퓨터가 필요했던 사운드 작업은 직접 소리를 제어하는 현재의 아르두이노 보드를 사용하게 되면서 훨씬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외형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2007년 작 'Silent Pollen-Sowing' 이후 김병호의 조형물에서 꽃대 혹은 막대가 모이는 중심원판은 조형적 중심인 동시에 소리를 만들어내는 제어 장치라는 이중적 역할을 깔끔히 수행해낸다. 기술과 미학의 성공적 만남은 미술이 동시대 진행되는 기술적 발전과 별개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예술관의 반영이기도 하다. 새로운 조형 언어의 모색과 그 수단으로서 기술의 개발이 다르지 않다는 그의 생각은 끊임없는 새로운 표현 언어(기술)의 개발과 엔지니어와의 협업 중시라는 방식으로 구현된다.

이렇듯 여러 모로 기계라는 개념에 부합함에도 완벽한 기계는 못 되는 것이 김병호 작품이 지니는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의 작업이 지니는 양가성은 작동은 하나 실리적으로 쓸 데가 없다는 기능적 측면 외에 시각적 외형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비정형과 정형, 유기적 형태와 금속성 재질의 충돌은 김병호의 작업 전반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생물학적 유비는 쉽게 눈에 띄는 요소로 주요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Soft Crash'(2011)는 날카로운 가시 혹은 촉수를 뻗고 있는 거대한 성게를, 'A Memory of The Rule'(2011)은 화려하게 펼쳐진 꽃의 수술이나 꽃잎을, 'Irreversible Damage'(2011)는 두 팔을 뻗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연상시킨다. 생물체의 부드러운 곡선과 금속성의 기계적 촉감이라는 이질적인 요소의 조우는 카를 블로스펠트나 알베르트 렝거파츠슈의 신객관주의(New Objectivity) 사진을 떠올리게 하는데, 발삼전나무나 꽃잎, 뱀비늘의 조형적이고 장식적인 패턴을 클로즈업해 냉정한 사실주의의 시각으로 이면의 본질과 규칙을 포착해내는 이들 독일 사진가들의 관점은 형식이나 목적 면에서 김병호와 통하는 점이 많다. 4에서 논의되겠지만 김병호 역시 가시적 형태를 통해 보이지 않는 측면을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2. 시각/청각

사운드 아트 혹은 미디어 아트의 문제는 그간 김병호 작업을 논할 때 가장 많이 다뤄진 부분이다. 영상공학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 혹은 소리를 동반한다는 작업의 특성은 그의 작품을 쉽게 미디어 아트라는 범주로 분류하게 만드나, 실상 김병호의 작업은 영상이나 소리가 주요 관심사인 전형적 미디어 아트 작품과는 거리가 있다.

일단 작품에 소리를 개입시키는 경향은, 관객이 버튼을 조작함에 따라 철판과 추가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를 형상화한 초기작 'Floating Space'(2005)에서부터 일관되게 지속된다. 하지만 그의 작업에서 특기할 점은 소리의 비중을 최대한 절제한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개입되는 소리의 크기와 속도, 단순성을 통제하는 것인데, 작가는 되도록 소리를 작고 느리고 단순하게 발생시킨다. 이는 작품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쉽게 소비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책으로, 소리의 비중이 어느 선을 넘게 되면 시각적인 측면을 압도해 작품의 조형성은 간과되고 소리에만 주의를 뺏기기 때문이다. 숲속의 새소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소리는 가까이 가야 비로소 명확히 감지되며 눈으로 보는 감상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하고 섬세하게 배치된다. 발생하는 소리를 구성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사운드는 강약, 고저, 음색 모두 멜로디나 화음을 이루지 않도록 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만들어진다.

이에 비해 실상 김병호의 조형물에서 훨씬 압도적인 것은 청각보다는 시각이다. 선택되는 재료의 물성은 특히 핵심적인 부분으로, 금속 특유의 반짝이는 표면은 조형물이 지니는 매끈한 곡선과 아울러 시각적 쾌감을 자아낸다. 실로 이번 전시의 가장 강력한 효과는 다름 아닌 금속의 반사하는 표면에서 산출되는데, 눈앞에서 방사되는 1006개의 막대 덩어리('Soft Crash')는 서로가 서로를 반사하며 순간적으로 거리 감각을 마비시키고 상()의 중첩을 야기한다. 초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같은 환영 효과는 그림자와 움직임에 의해 한층 강화된다. 오브제가 돋보이도록 일부러 그림자를 지우는 작품사진 촬영과는 대조적으로 실제 관람 환경에서 조명과 그림자의 역할은 막대하다. 그림자는 거울 역할을 하는 금속의 반사 표면과 함께 뻗어 나온 막대들이 실제보다 몇 배나 많아 보이게 만들어 조형물의 물리적 크기를 뛰어넘는 몰입 환경을 조성한다. 만약 관객이 조형물 앞에서 움직인다면 착시 효과는 더욱 커진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시점은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시각적 인지를 몇 배로 복잡하게 만든다. 찰나나마 강력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술적인 착시의 유희는 본격적으로 거울 효과를 의도한 'A Memory of the Rule'에서 극대화된다. 작품 앞을 움직이며 붉은 막대와 그림자의 환각 놀이에 어지럽던 관객은 중심에 놓인 금속에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과 막대들을 들여다보면서 마치 이 세계 저편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으로 빠져들 것 같은 현실감각의 도치를 경험한다.

하지만 소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비중 상 미미할지라도 소리의 유무는 작업의 성격을 크게 좌우한다. 소리가 빠진 김병호의 조형물은 그저 추상조각일 뿐이다. 회로도와 설계도면을 통해 조립된 작동하는 기계라는 측면이 사라지는 것이다. 더욱이 'Soft Crash''A Memory of the Rule'처럼 수많은 소리 기둥으로 둘러싸인 작품의 경우, 소리의 존재는 서라운드 효과를 양산하며 조형물의 시각적 착시가 낳은 환영 공간을 심화시킨다. 이 속에서 관객은 공간이 주관적으로 변형되고 주체가 공간적으로 압도되는”(할 포스터) ‘바로크 효과를 일부 체험하게 된다.

3. 물질/()물질

소리의 존재는 물질로 비물질을 표현한다는 작가의 중심 테제에도 핵심적 역할을 한다. 소리란 형체가 없이 순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으로 비가시적인 에너지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소리의 인지는 음원의 파동이 공기 입자를 밀어내고 밀어낸 입자의 밀도와 압력의 변화가 진동 에너지로 바뀌어 귀에 있는 청신경에 전달되는 에너지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운드는 에너지 변환이나 미시적인 힘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요소로서 물질인 조형물에 비물질성을 불어넣는 데 기여한다.

보이지 않는 힘과 에너지, 시스템의 구조와 규칙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처음부터 꾸준했다. 초기작 'Floating Space'는 전자석을 통해 자기에너지의 변화를 소리와 빛으로 실체화시키고자 한 것이고, 'Their Flowers'(2006) 연작과 'Silent Pollen'(2007-10)은 조용히 번식하는 꽃의 강력한 증식작용을 가시화하려 한 것이다. 단파의 'Silent Pollen-Sowing'과 장파의 'Silent Pollen-Gathering'이 조용히 주고받는 소리는 꽃가루의 전달이자 에너지의 이동과 다르지 않다.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침묵, 영원, 집적, 시스템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명명된 작품 제목에서도 은연 중에 표출된다.

비물질을 물질로 가시화한다는 의도는 제작 및 조형 상의 특징에도 반영된다. 제도와 체계,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 즉물적으로는 작업을 만드는 프로세스 상의 규칙과 표준화라는 기계적 메커니즘의 형태로 드러나고, 조형적으로는 기하학적 단순성과 추상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특히 드로잉에서 구조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직선과 곡선의 유기적 조합으로 형성된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주는 아름다움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점, , 면을 통해 형태, 나아가 세상의 추상적 구조를 담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다. 방향과 크기를 가진 벡터(vector)로서 에너지의 흐름은 'Irreversible Damage'처럼 각진 형태를 띠거나 'An Interface'(2010)처럼 방향성이 두드러질 때 특히 명료해진다. 'Triffid'(2010)'Horizontal Intervention'(2010)처럼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는 힘의 균형은 숨겨진 중력장의 존재를 암시한다.

부유하는 힘에 대한 궁금증이 보이지 않는 물리학적 규칙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되고 결국 사회적 규범과 세상의 원리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번 전시 제목의 계기가 된 동명의 작품 'A System'(2010)은 이러한 작가의 작업관이 잘 드러나는 작업으로, 여기서 서로 다른 길이의 우레탄 호스는 노드 역할을 하는 T-커넥터로 연결되면서 어렴풋이 그리드(grid) 형태로 환원된다. 각기 다른 길이가 얼추 서로 같은 거리를 만들면서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하는 방식은 뒤샹의 유명한 'Three Standard Stoppages'(1913-14)를 역발상한 듯도 하다. 여기서 1m짜리 실 3개가 떨어져 휜 모양 그대로 만들어진, 길이가 제각기 다른 자(ruler)는 절대적이라 상정되는 사회의 척도와 규범 역시 시대와 사회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의 징표다. 시각과 청각, 물질과 비물질,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사이에서 유동하는 김병호의 제품/오브제 혹은 기계/비기계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과 에너지, 규칙을 잠시 육화한 것이다. 그러나 본성상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비물질처럼 김병호의 조형물 역시 언제 어떻게 또 다른 형태로 변태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가 만들어낸 형상들은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오브제”(2010년 소마 드로잉센터 전시 제목)니까 말이다.

문혜진(미술이론,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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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_공감각의 변주

김병호의 작품을 대하는 첫 시선은 이렇다. ‘이것이 대체 무엇을 하는 장치란 말인가...’ 말끔하게 번쩍이는 금속성 재료가 줄지어 앞으로 나란히 혹은 사방으로 헤쳐 모여 있는 기이한 모습에 일견 어느 거대한 기계장치의 부속품을 레디메이드로 제시한 기발한 설치물로 보인다. 게다가 작품에서 소리가 난다. 일명 사운드 아트, 소리의 예술이다.

 

20세기 현대음악의 거장으로 일상 소음과 예술로서의 소리를 동격화한 존 케이지의 급진적 시도는 예술과 삶을 시청각적으로 혼재시킨 선구적 실험이었으며 이후 시각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세기 중반부터 음악은 시각 예술과 꾸준히 상호 교류하며 혼성되어 노이즈 혹은 사운드 트랙 등 다양한 변주로 작품 안에 유입되었다. ‘회화의 종말이 수차례 예지되었던 현대미술은 몇 단계의 변모를 거쳐 왔다고 할 수 있는데, 기본적인 구성요소의 해체, 해체된 개별요소의 절대화, 기본적 요소의 무시와 물성의 강조, 그리고 비물질성의 개입이 그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 비디오 아트에 의해 매스 미디어적 시각문화의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면서 비()물질인 빛과 소리가 개입되었고 사운드 아트로 개별 진화되었다. 사운드 아트는 60년대 워홀의 팩토리, 비디오 아트, 플럭서스, 퍼포먼스 아트 등에 편승하여 부차적 매체로 부각되었으며, 소리 자체가 주연이 되어 전시가 개최된 것은 20여 년 전 부터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초반부터는 영국, 일본, 미국의 주요 기관에서 소리 예술을 작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소리를 보다’, ‘소리의 색채’, ‘빛과 소리’, ‘시각적 음악, 이들 전시의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 이상의 신체적 감각이 서로 연결되는 공감각적(共感覺的, synaesthesia) 공간 창조이다.

 

김병호 작가가 사운드와 오브제가 결합된 작품의 제목을 ‘Colloidal Body’라고 붙인 것은 서로 녹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상의 성분이 거시적으로 혼합된 상태에 있는 것을 콜로이드라고 총칭하는 것과 상통한다. 작품의 창작은 자유의지이며 작품의 감상 또한 자유의지일진대 그에 비추어 봤을 때 김병호의 작품 제작 방식은 남다르다. 마치 제품의 설명서인 듯 제작 과정을 정밀하고도 예술적으로 그려낸 설계도면 드로잉은 그가 가진 작업관의 명료한 선언문과도 같다. 그는 창작에 규율과 법칙을 부여하고 소음을 구조화시키는 음악적 프로세스를 주입함으로서 작품에 제품이라는 충격적이면서 신선한 타이틀을 부여한다. ‘물질 속에서 비물질적인 소리가 생성되는 것은 사회적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추구되는 인류의 욕망과 같다는 김병호 작가의 말에서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서, 그리고 제품과 작품 사이에서 ‘cool'’hot'의 미묘한 혼재를 겪고 있는 작가의 매력적인 자화상을 보는 듯하다. 소리가 나는 제품의 기능성 혹은 실용성은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조형성 혹은 예술성에 희석되어 있으며, 작가는 소리라는 기능이 내재하고 있는 아우라와 담론에 주목한다.

 

20세기 후반 테크놀로지의 탄생, 특히 컴퓨터의 출현은 대부분 예술 장르의 형식적 구현에 있어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컴퓨터의 출현으로 소리를 포착하고 조정하는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었고, 강력하고 매혹적인 필터링 시스템을 통한 새로운 사운드 창조나 기존 사운드의 급진적 보정작업에 가속이 붙었다. 컴퓨터에 대해 가장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어떠한 정보도 컴퓨터 코드라는 공통 언어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김병호 작업의 특징이자 변별력은 이러한 해석 과정에 철저히 규격화된 작품에 내재된 기능성, 그리고 심미적 형태의 조형성을 담보함으로서 일종의 하이퍼-공감각을 경험하도록 하는 것에 있다. ‘발견된(found)' 소리, 해독되어야 할 오디오 정보의 팔레트 속에서 작품의 속성에 적합한 주파수, 음파의 간격의 찾아내고 관객들이 그 소리를 통해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응시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작업태도는 판화과를 졸업한 작가가 영상공학을 공부하며 몸담았던 미디어 랩에서의 경험에 기인한 듯하다. 사운드의 재료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존 케이지의 침묵 개념, 즉 침묵은 소리의 부재가 아니라 분위기임을 작업의 축으로 둔 것은 미술학도로서 공학도에 가까운 작가의 집요한 성향 덕분일 지도 모른다.

 

사운드 아트가 사운드/아트/비주얼 아트/음악/과학/엔지니어링과 같이 고정된 카테고리에 도전하는 새로운 미디어 아트로 출현한 이래 미술의 제도권에 진입하는 데에는 난항이 있었다. CD나 사운드로만 존재하는 작품들은 금세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기 십상이나, 김병호 작품의 경우는 문화적으로 코드화된 환경 안에서 끝나버릴 수 있는 사운드 아트를 오브제로 압축 제시함으로써 물질적 가치를 얻는 동시에, 시각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시각적 존재감을 증폭시키는 사운드의 비물질적 가치까지 더함으로써 예술작품으로서의 존재이유를 획득하고 있다. 정보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보여주는가 하는 것이 미디어의 본질이라며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고 한 맥루한(Marshall MacLuhan)의 말처럼, 결국 남는 것은 구체적 실체가 아닌 기표에 따른 음의 전달, 입력(input)과 출력(output)의 분명한 구분에 의해 뱉어지는 진실이다. 이번 김병호 작가의 개인전에 선보인 오브제들은 서로 다른 비트와 주파수를 가진 3개의 소리를 통해 각각의 진실을 토해내고 있으며, 동시에 그 소리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구체적 오브제와 제작 방법을 도표화한 드로잉을 통해 시각문화의 카테고리 안에서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다. 앞으로 작가가 보여줄 소리와 들려줄 오브제가 어떠한 변주를 펼칠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박윤정 (소마미술관 책임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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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stic Virus

바로크 음악을 특징짓는 것 중의 하나가 통주저음(Basso continuo)의 사용이다. 통주저음은 록음악에서 베이스 기타의 연주처럼 드럼이나 일렉트릭 기타에 묻혀 그 음이 드러나지 않지만 곡 전체의 긴장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통주저음이 없다면 바로크 음악이 지닌 긴장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통주저음은 실제로 거의 지각되지 않지만, 그 소리 때문에 바로크 음악에는 비트가 존재한다. 이는 마치 바로크 회화의 테네브리즘(Tenebrism)과도 흡사하다.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지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화면의 강렬한 명암대비를 말한다. 바로크의 그림에 존재하는 어두운 배경은 그 자체는 명확한 지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배경처럼 존재하지만, 오히려 화면 전체의 극적 긴장감을 생산하는 무의식적 바탕이다. 의식에 직접 지각되지 않는 미세한 것들이 오히려 예술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김병호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미세지각들로부터 하나의 판타지를 만드는 과정이다. 그는 바이러스처럼 눈에 드러나지 않는 아주 미세한 것들을 모아서(grouping) 매우 세련된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형상은 얼핏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사물이나 조형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일상적 사물이나 단순한 조형물이 지닐 수 없는 긴장감이 존재한다. 통주저음처럼 미세한 바이러스들이 끊임없이 분출되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미세한 꽃가루가 날리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단순히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판타지인 것이다. 그저 하나의 사물이라면 긴장감이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판타지도 성립하지 않는다. 판타지는 언제나 현실 혹은 사물과의 긴장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작품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어떤 것일까? 그의 작품에서 긴장감은 매우 중층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안정되고 세련된 작품의 형상과 작품외부 환경과의 긴장,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긴장, 인위적인 것(artificial)과 예술적인 것(artistic)의 긴장, 제품(product)과 일상품(ready made)과의 긴장 등이 그것이다. 외관상 그의 작품은 매우 세련될 뿐만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완벽할 만큼의 완성미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것은 결코 예술적 완성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이 완성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제품처럼 보인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그는 이러한 역설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역설 자체를 보여주고자 한다.

 

잘 들여다보면 이러한 역설은 곧 인위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역설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은 매우 인위적인 것이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먼저 작품의 대체적인 형상을 스케치할 뿐만 아니라, 작품이 정확하게 만들어지기 위한 도면을 제작한다. 그의 작업은 스케치와 도면작업으로 이어지는 디자인 과정과 흡사하다. 그의 작품은 매우 정밀한 부속품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계와 다를 바 없다. 이러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도면에 따라 부속품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가공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전체로 조립한다. 당연히 그 결과물은 자연물이 아닌 지극히 인위적인 인공물이다. 하지만 그는 인위적인(artificial) 것을 제작할 뿐 예술적인(artistic) 것을 배제한다.

이러한 예술적인 것의 배제는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것의 배제와도 관련이 있다. 그는 예술작품을 제작할 때 주관적인 요소들을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한 주관적인 요소의 배제는 형상과 물성의 두 가지 차원에서 나타난다. 형상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지극히 주관적이거나 불필요한 잉여의 요소들을 억제한다. 가령 수평적 개입’(horizontal intervention)의 경우 비스듬한 선이 기하학적 대칭을 이룬다. 이러한 기하학적 대칭과 단순성은 임의적인 요소, 즉 주관적인 요소를 막기 위한 것이다. 임의적인 요소가 첨가될 경우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제품이 아닌 작가의 의도를 담은 주관적인 산물로 보일 것이다. 그 경우 인위적인 것이 아닌 예술적인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미니멀리즘을 계승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제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결코 미니멀리즘 조각의 연장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주관적인 요소의 배제는 재료가 지닌 물성에 대한 충실성으로 나타난다. 이는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의 팍투라’(factura)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당시 철이라는 새로운 건축 재료는 과거의 대리석과 달리 기하학적이고 과학적인 형상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건축 재료로서 철이 지닌 물성은 귀족적이고 낭비적인 취향의 화려한 장식과는 맞지 않는다. 물성에 충실한 새로운 조각과 건축은 지극히 과학적인 것이며, 진보적인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김병호의 작품도 물성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팍투라의 관행을 따른다. 그는 스테인리스, 황동 등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할 경우에도 작가의 의도대로 재료의 물성을 변경하기보다는 스테인리스가 지닌 물성 자체에 가급적 충실하고자 한다.

이렇게 객관적인 것에 충실한 그의 작업이 만든 결과물은 제품’(product)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디자인 작업과 흡사한 작업을 거친 것이나 주관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모두 제품의 특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역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결코 산업 제품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실제로 제품으로서 그의 작품이 갖는 의미가 단순히 예술작품과의 긴장관계만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데서 찾을 수 있다. 오히려 그의 작품이 미술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레디메이드’(기성품)와의 미묘한 긴장감에서이다. 그의 작품은 흡사 레디메이드처럼 보이지만 결코 레디메이드가 아니다. 말 그대로 레디메이드는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일 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치밀한 설계에 의해서 제작된 제품이다. 미술사적으로 레디메이드의 활용이 예술과 일상에 대한 경계를 허무는데 있었다면, 김병호의 제품제작은 레디메이드가 허물어뜨린 예술과 일상의 긴장을 새롭게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긴장은 단순한 예술적 고민을 넘어선 어떤 사회적 차원을 암시한다. 작가는 제품의 제작을 통해서 눈에 드러나지 않는 엄밀성을 추구한다. 그는 정밀한 기계와도 같은 제품의 제작을 통해서 완성도 높은 조형물을 만들지만, 이러한 완성도 높은 조형물의 탄생은 미시적인 부분들의 안정된 체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를 하나의 인위적인 사물, 즉 제품으로 비유하자면 사회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미시적인 것들의 규범과 체계들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제품은 표준적 규범 혹은 인터페이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체계물이다. 그러한 체계는 미시적인 차원의 개입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의 작업은 바로 바이러스와 같은 미시적인 차원으로부터 인터페이스로서 사회라는 체계를 형성하려는 판타지의 제작인 셈이다.

박영욱(연세대학교 미디어아트연구소 HK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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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욕망을 마주하는 방법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깡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텅 빈 연쇄고리라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실재하는 것처럼 보인 욕망의 대상이 실제로는 허구이며, 그러기에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한 기표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욕망이란 개념은 과연 그러한가? 번지르르한 껍데기만을 지닌 채 우리 주변에서 실재하고 있지는 않는가?

 

김병호의 작업은 이러한 허구적인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것의 판타지를 실재적으로 재현한다. 그는 차가운 금속을 조립하고 말쑥하게 마감하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인간의 욕망이 증식되는 과정으로 대치시킨다. 그의 작업은 마치 다양한 인간의 욕망이 서로 결합되고 증폭되어 새로운 욕망의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유사하다. 욕망이란, 그 자체로는 어떠한 구체적 형태를 지니지 않는 대상을 향한 갈망의 덩어리이다. 따라서, 그것이 다소의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감정의 응집물로서 그 자체로 순수하다. 욕망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기도 한다. 이러한 욕망의 면면들은 김병호의 작업에서 서로 다른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가 제시하는 첫 번째 유형은 시리즈의 제목에서 암시하고 있듯(Silent Pollen), 욕망의 소리 없는 증식 과정을 재현하는 것이다. 수십 개의 알루미늄 관으로 구성된 일련의 작업들은 고요하게 발생하여 서로 결합되고 증식되는 욕망의 판타지를 가시화한다. 그는 이러한 과정들을 이라는 상징적 지표로서 나타내고 있는데, 아름다움의 상징으로서의 꽃은 그의 작업에서 욕망이 하나의 대상으로서 실재하는 순간을 상징한다. 욕망 그 자체가 대상 없이 생성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이러한 작가의 의도는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꽃의 수분 과정을 은유적으로 차용할 뿐만 아니라, 욕망이라는 추상적 개념마저도 물성화된 차가운 표면 속으로 끌어들여 작품의 균형감을 획득한다.

 

이 작품에서 또한 주목할 지점은 이러한 욕망의 증식 과정이 미디어의 개입으로 현시된다는 점이다. 마치 욕망의 증식 과정이 고요하게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이면에는 무수한 요인들을 동인으로 삼는 것처럼, 설치된 작품은 관람객들의 작은 소리를 흡수하여 임의의 사운드로 확대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미디어의 개입은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수 많은 꽃가루 관 속의 작은 입 · 출력장치들이 자신도 모르게 증폭되어 버리는 스스로의 욕망의 순간들을 재현하는 셈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절제된 사용은 그의 전반적인 작품에 개입된 미디어의 위치를 상기시킨다. 그는 마치 창조주가 흙으로 인간을 빚고, 숨으로 정신을 불어넣듯이 99%의 에너지로 작품의 형태를 만들고, 이후 1%의 개입으로 미디어를 활용한다. 이러한 그의 개념은 현재의 미디어가 지닌 과도한 상호작용성에 의한 관객의 이탈을 방지한다. 작품에서 나타난 소극적인 미디어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그를 미디어아티스트라고 부른다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김병호 작업의 두 번째 유형은 첫 번째 유형과는 다르게 욕망의 실체를 과감하게 드러낸다(Assembling for Eternity). 첫 번째 유형의 작업에서 보여준 욕망의 증식 구조는 이제 더 이상 소리 없는 과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조심스럽게 재련한 욕망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극도로 물성화된 덩어리로서 나타난다. 앞서 기술한 라깡의 언급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가 제시하는 욕망의 덩어리는 인간의 심연 저편에 존재하던 욕망의 실체를 바로 몸에서 꺼낸 듯, 탐욕스럽고 끈적끈적하다. 여기서 그의 작업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물성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자. 우레탄 고무를 입힌 강철에 페인트를 금방이라도 퍼부은 것처럼, 매끈하면서도 뚝뚝 떨어지는 안료를 그대로 드러낸 작품들은 그가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에게 시각적인 전달을 넘어 촉각적이고도 청각적인 공감각적 감상을 의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만든다. 아마도 첫 번째 유형에서 보여준 차갑고 절제된 표면이 정제된 물성을 기반으로 한 주제의 이식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유형은 미디어를 집어삼킨 욕망의 덩어리가 그 자체로서 공감각적 감상을 유발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앞서 언급한 이러한 두 가지 작품의 유형은 그 변주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2008년 작인 ‘Assembled Fantasy’는 이전의 작업과는 다르게 관객들의 개입의 여지를 제공하는 작품이다. 전작들에서 욕망이 스스로 증식되어 순환하는 구조와 덩어리로 응집되는 순간들이 가시화 되었다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관객들이 지닌 저마다의 욕망의 판타지를 체험하게 만든다. 거대한 생식기처럼 보이는 기하학적인 작품의 외형이 그 자체로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듯 보이지만, 마치 산업 디자인 제품처럼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는 각각의 부분적 요소들이 사운드를 변환시키고, 생산시키는 일종의 사운드 모듈레이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또 다른 의미로서 읽힐 수 있다. 작가는 관객의 참여에 의해 부분적 요소들에서 발생하는 소리의 진동으로서 서로 조립되고 증식되는 욕망의 순간을 변주한다.

 

현재 그는 지금까지 작업에서 보여 준 몇 가지의 원칙들을 공간과 결합시키고 있다. 마치 욕망이라는 존재가 대상을 전이하며 스스로를 확장시키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다른 시·공간에 위치시켜 새로운 맥락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형태를 만들 때,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형상을 상상한다고 말한다. 비록, 그 모티브나 사고의 근본적인 시작점을 추적해보면 개인의 경험과 인식으로 귀결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시도들이 기능 속에 함몰된 형태의 자율성 및 상상력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구조화 된 욕망의 판타지처럼, 상상력에 의한 형상의 논리적 구조화가 우리들에게 스스로의 지각과 반성, 그리고 근본적인 토대로서의 현실을 인식시키고 있음을 감지한다. 이제 그의 작업에서 빠져 나와 우리의 현실을 반추해보자. 그것이 더러는 추하고 어지러운 현실일지라도 말이다.

유원준 (앨리스온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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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ing Sound Sculpture

미디어아티스트 김병호는 판타지를 디자인한다. 그에게 판타지는 인간의 욕망임과 동시에 인간 컨트롤에 의한 것이다. 생명을 지닌 일체의 것들 속에 판타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그는 인간의 욕망을 부단히 각색, 조정, 배합한다. 따라서 욕망이 강렬할수록 판타지는 정교하게 레디메이드화되어 상품의 분위기를 유발하게 된다. 김병호의 작품은 욕망의 재현이 아니라 결과다.

욕망하되 컨트롤할 수 있다는 그의 시각은 미디어를 다루는 과정에도 그대로 흡수된다. 디지털시대에 미디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사고의 일부를 이끈다. 우리의 사고가 컴퓨터프로그래밍에 따라 가변적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김병호는, 미디어는 인간의 도구며 따라서 전적으로 인간의 컨트롤 하에 있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이런 도구적 관점에서는 미디어이미지가 물질을 전제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강철에 우레탄고무를 입혀 가열한 상태를 노출시킨 'Assembling for Eternity 1'(2008), 'Assembling for Eternity 2'(2008)는 비()물질적인 관념을 유기적인 형태의 물질덩어리로 추상화한 작품으로, 철저히 물성에 기반하는 그의 작업스타일을 반영한다. 영상이미지의 주된 속성이 비()물질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가 영상작업에 주력하지 않는 까닭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에게 물성은 미디어의 원천이다.

 

하이테크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시대에 김병호의 관점은 다소 고루해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할 점은, 과거에 미니멀아트가 물성에 천착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빛 등의 비()물성을 도입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병호 역시 물성을 파고들어가 비()물성을 혼재시킨다는 사실이다. 'Silent Pollen sowing'(2007), 'Silent Pollen gathering'(2007)에 등장하는 사운드는 이런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동일한 듯 다른 이 두 작품은 기존 ‘Flowers’ 시리즈의 연장으로, 꽃가루에서 잉태되는 생명의 순환구조를 조형화하고 그 과정을 무정형의 사운드로 은유한 작품이다. 선반(旋盤) 작업을 통해 수십 개의 알루미늄이 꽃가루관 형태로 연마되어 있고, 각 관의 입구에는 꽃가루를 상징하는 수십 개의 마이크로스피커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꽃가루관을 지탱하는 원형판 속에는 와이어링 보드 및 DTMF 발생기가 장착되어 이에 따라 임의의 사운드가 발생하게 된다. 이때 사운드는 마주한 오브제에서 동시에 발현되지만 청각의 시각화를 거치는 통감각적 연상작용은 서로 다르다. 마치 수술과 암술의 결합을 상징하듯 한쪽 'sowing'에서는 무언가를 발산하는 뉘앙스의 사운드가, 맞은편 'gathering'에서는 수렴하는 뉘앙스의 사운드가 얽혀 전체적으로 무언가 주고 받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처럼, 고집스러우리만치 오브제의 물성과 조형성에 천착하는 김병호의 작품이 적확하게 미디어작업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사운드의 조력이 크다. 조형언어는 공간을 점유하며 시간 속에서 지속되지만, 청각언어는 공간을 점유하지도 또 시간 속에 남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발현되는 순간에만 존재할 뿐, 궁극에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게 마련이다. 김병호는 이런 청각언어, 즉 사운드를 통해 비()물질성을 획득한다. 적어도 현재까지 그의 작업에서 사운드는 미디어아트의 속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요인 중 하나며, 'Assembled Fantasy'(2008)는 이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킨 오브제 작업이다. 총 무게가 60kg에 달할 정도로 육중한 이 작품의 둥근 몸통에는 23kg의 납이 내장되어 몸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기다란 원형 관() 형태 속에 스피커, 파워앰프, 오실레이터 및 멀티모드필터 모듈 등의 3단 구조가 디자인되어 컴퓨터보드 프로세싱에 따라 작동한다. 사운드를 변환하는 앞 3마디(멀티모드필터 부분)와 소리를 생산하는 뒤의 3마디(오실레이터 부분)를 각 마디 별로 조율해서 다양한 진폭의 사운드를 생성할 수 있으며, 더불어 약 3인치 크기의 스피커가 중, , 고음을 두루 연출하도록 모델링되어 있다. 이 작품은 특히 관람자의 직접적인 사운드 퍼포먼스를 요한다는 점에서 그의 여타 작품들에 비해 인터랙티브 속성이 강하다.

 

그런데 미디어아트의 본질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강조하는 김병호 작품에서의 인터랙션은 그리 용이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테크놀로지 기반의 미디어는 본래 폭력적인 속성을 지녀서 약간의 힘만 가해도 그 임팩트가 위압적일 수 있다. 가령 모더니즘시대에 미래주의를 위시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기계음을 비롯한 온갖 소음을 기술혁신에 상응하는 진정한 음악으로 간주하고 이의 적극적인 향유를 유도했다. 그 결과로 현대음악의 지평이 확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자연스럽지 못한 청각 형식을 강요하는 역작용도 초래했다. 김병호가 오브제의 조형성 못지 않게 사운드의 조율과정을 놓치지 않는 것도 이런 견지와 맞닿는다. 앞서 언급한 'Silent Pollen sowing, gathering' 시리즈는 관람자가 아주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서는 사운드를 쉽게 지각하지 못할 만큼 음량효과를 극도로 절제했으며, 'Assembled Fantasy'도 듣는 이를 놀라게 할 정도의 굉음이 가능하지만 이 역시 연출자(관람자)가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 수용자로 하여금 시각이 일정 정도 거리를 두게 하는 반면 청각은 직접적으로 침투함으로써 효과가 더 강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의 미덕인 인터랙티브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과 노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인터랙션을 촉발하기 위한 시스템이 오히려 자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하는 등, 하이-인터랙티브 작품일수록 조작성의 딜레마에 갇히기 쉽다. 급진적인 미디어이론가 볼츠(N. Boltz)는 수동적인 수용미디어를 능동적인 참여미디어로 대체하리라는 전망은 이상주의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꼬집으면서, 이제 성공적인 커뮤니케이션은 미디어 트레이닝에 달려있다고 규정한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점에서 김병호는 즉각적이고 원활한 커뮤니케이션 대신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택했다. 그리고 은폐된 강제를 걸러낸, 자율적이고 유연한 피드백을 시도한다. 그가 고수하는 오브제의 조형성은 사운드 같은 비()물성의 즉각적인 인터랙션에 다소 더딘 관람자를 배려한 장치다. 그에게 미디어는 도구며, 새로운 조형언어를 모색하는 것은 도구를 개발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김병호의 합리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혜현(예술학,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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