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 한국의 ‘본격적인’ 디지털미디어아티스트를 꼽으라면 언제나 1순위에 그가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평범한 미술대학 조소과를 나왔을 뿐이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뛰어난 프로그램이나 코딩, 범상한 테크놀로지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기술을 그가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에르메스 상을 수상하면서 미디어아트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양아치에게는 미디어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이 심심치 않게 따라다닌다. 그것은 아마도 테크놀로지에 천착하지 않고, 미디어를 대하는 그의 태도가 본질적으로 미디어아트의 초심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디어아티스트’로서의 양아치의 본격적인 활동은 2002년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있었던 <양아치조합>이라는 전시에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온라인 상에서의 한국성에 대한 것이라 이야기하려 했다고 했다. 작업은 아주 단순한 웹사이트에 불과했지만, 그 곳에 올라가 있는 단어는 그리 단순한 내용들이 아니었다. ‘재벌’, ‘현대’, ‘금강산’ 등 단어만 들어도 당시 한국사회에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꽤나 이슈가 될 법한 것들을 웹사이트에 ‘진열’해 놓고서는 팔겠다고 나섰다. 물론 실제로 매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아치의 미디어아트는 테크놀로지에 환호하거나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낙관론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세상을 이야기하고,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언급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전시로 기억될만하다.
이 같은 작업의 경향은 <전자정부 e-govenment> (2003, 인사미술공간) 프로젝트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작가도 밝히듯이 <전자정부>는 ‘감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감시’는 이후 양아치의 작업에서 계속적으로 드러나는 중요한 키워드이기에 좀 더 주목할 만하다. 푸코가 지적했듯이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로 저장되는 사회에서 테크놀로지는 어느 순간 전체주의적인 권력의 도구로 오용될 소지가 있다. 이러한 상황을 푸코는 제레미 벤덤의 용어를 빌어 ‘판옵티콘’의 사회라 불렀다. 양아치 역시 <전자정부> 작업을 통해서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전에서 야기되는 판옵티콘적 상황, 그리고 그것이 만연한 판옵티코니즘의 문제적 상황을 주목하고 언급했다.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상황의 심각성이 얼마나 관객들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잠시 차치하더라도, ‘감시’시스템에 대한 본격적인 화두를 던졌으며, 나아가 이후 <미들코리아>와 같은 프로젝트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국가’ 시스템들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아치 작업의 연대기에서 빼 놓아서는 안 될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양아치의 <미들코리아:양아치에피소드> 시리즈는 지금껏 어떤 작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내러티브 구성이었다. 새로움은 종종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보고 관객은 물론 미술계 관계자들도 당황했다. 물론 그것은 가장 처음 웹이라는 테크놀로지를 작업에 본격적으로 끌어 들었던 작가가 다시 전통적인 매체인 설치, 조각으로 돌아섰다고 생각한 데에서 오는 약간은 실망 섞인 당혹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 그래도 미디어아티스트들이 많지 않은 한국적 상황에서 역량 있는 작가가 돌아섰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양아치의 작품이 흘러온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오해이다. ‘양아치 에피소드’라는 부제를 달고 진행되었던 <미들코리아:양아치 에피소드> 3부작에서 다루고 있는 상당한 내용들은 이미 <양아치조합>과 <전자정부>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고민들이 발전된 것이었으며, 작가가 전달하려는 복잡해진 내러티브와 다양한 화자의 등장은 하나의 완결된 시각작품으로만 보여주기에는 그 덩치가 너무 커져있었다. 때문에 사진, 설치, 이야기책으로 구성된 미들코리아 3부작 시리즈는 그가 이야기하려했던 내용들을 수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당연한 귀결로서의 새로운 ‘미디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리하자면 양아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낼 양아치의 ‘뉴 미디어’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작가 양아치에게 미디어는 자신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다. 말 그대로 ‘미디엄’이다. 그러므로 그가 특정 매체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새로운 매체/장르에 도전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양아지 역시도 어떤 상황을 이야기할 때 가장 적합한, 혹은 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매체라면 장르를 떠나서 흔쾌히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감시 카메라는 양아치가 찾은 또 다른 미디어로 볼 수 있다. 감시 카메라의 실험적인 사용은 2007년 종로에 있는 한 은행의 주차장에 설치된 무선 감시카메라를 해킹하여 작업한 <감시드라마:연애의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감시드라마:킬빌>, <감시드라마:007> 등 몇 편의 ‘감시드라마 시리즈’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감시카메라를 매체로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민한다. 감시카메라는 양아치가 가지고 있던 감시체계, 즉 판옵티콘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매체였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시민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것과 같은 이유를 들어 정부차원에서 감시카메라의 설치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지역성에 대한 이슈를 늘 가지고 있던 양아치에게는 그 무엇보다 완벽한 미디어였다. 그렇게 감시카메라를 활용하는 ‘감시드라마’ 시리즈를 통해서 양아치는 점차 퍼포먼스/공연 다시 말해 현장성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갔다. 다른 작업들에 비해서 ‘감시 드라마’시리즈는 그리 오래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양아치의 작업을 특징짓는 ‘밝은 비둘기 현숙씨’ 시르즈로 넘어가는 이행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업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양아치가 처음으로 <밝은 비둘기 현숙씨. 경성>을 내놓았을 때, 관객들은 <미들코리아 양아치 에피소드>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난감해 했다. 이제야 ‘미들코리아’가 전해주는 이야기 전달 방식에 조금 익숙해져갈 무렵이었는데, 작가는 돌연 ‘미들코리아 양아치 에피소드’는 처음 계획했듯이 3부작으로 끝이 났다며, 퍼포먼스와 감시카메라를 사용한 현숙씨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숙씨 이야기의 첫 편 <밝은 비둘기 현숙씨, 경성>은 앞서 언급했던 2007년 시작된 ‘감시드라마 시리즈’와 2009년 작업인 <그럼에도 빙의소녀>(2009)에서 모티브를 빌어 왔다. 특히 일관된 주체가 없는 현숙씨의 모습은 <그럼에도 빙의 소녀>에서 발전된 캐릭터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비둘기의 세계,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을 자신의 관점처럼 되뇌는 현숙씨가 처음에는 낯설게 다가올 뿐 아니라, 파편화 된 그녀의 이야기를 소화하기에도 어렵다. 하지만, 조금만 각도를 틀어본다면, 현숙씨는 지금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표상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주입되는 의견들을 마치 자신의 의견인양 헷갈려 하고 반복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비둘기의 세계와 세상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되뇌는 현숙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둘기 현숙씨 시리즈에서 흥미로운 또 하나의 지점은 양아치가 현숙씨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미디어시티 서울 2010 출품작인 <밝은 비둘기 현숙씨, 경성>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덕수궁을 통해서 전개된다. 서울시립미술관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선 비둘기 현숙씨가 광화문 광장, 정동극장, 그리고 덕수궁을 본다. 머리에 쓴 헬맷에는 박제된 비둘기가 앉아 있고, 비둘기의 날개짓을 흉내 내는 듯한 동작들이 이어지고 나래이션이 깔린다. 여성 나래이터의 목소리가 비둘기 현숙씨의 동작과 움직임을, 그리고 다양한 인물들의 입장을 읽어간다. 1031년 스톨홀름대학 경제학 학사가 된 조선시대 여성 최영숙, 순종폐하와 순정효황후를 부르는 윤택영 후작. 안기영, 신여석 박인덕, 소다 가이찌등 낯선 인물들의 이야기가 비둘기 현숙씨를 통해서 전달된다. 역사와 픽션, 퍼포먼스와 비디오, 나레이션 등 이질적인 요소들을 넘나들고 있는 이런 모습이 바로 비둘기 현숙씨의 기본 구조이다.
이후 비둘기 현숙씨는 <엘르>, <사옥정> 등 그 버전을 바꿔가며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물론 기본 구조는 박제된 비둘기가 올라앉은 헬맷을 쓴 비둘기 현숙씨의 움직임과 동선을 따라가고, 촬영(혹은 공연)장소에 따라서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가 넘나드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강남의 유명 명품멀티숍은 꼬르소 꼬모에서 촬영한 <밝은 비둘기 현숙씨: 엘르>에서 현숙씨는 청담 고등학교, 갤러리아 백화점, 패션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현숙씨가 트리니티 플레이스를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런가 하면 <밝은 비둘기 현숙씨:사옥정>은 문래예술공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양아치의 비둘기 현숙씨의 작업은 지금까지의 양아치 작업에서 시도되었던 다양한 양상들이 한 데 어우러진 총체극과 같다. 주어지는 장소와 상황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미들코리아: 양아치 에피소드>와 닿아 있고, 앞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감시드라마에서 시도되었던 퍼포먼스적 양상은 현숙씨의 퍼포먼스 안에 남아 있다. 물론 이전 작업들에서 보여주었던 요소들이 파편적이었다면, 비둘기 현숙씨 시리즈 안에서는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은 듯 안정된 구조이다.
끝으로 비둘기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비둘기 현숙씨에서의 비둘기는 다양한 의미의 층위를 가지고 있다. 우선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의 입장을 현숙씨에게 대입시킨 것일 수 있다. 비둘기가 흔히 보이듯이 현숙씨 역시 특별한 어떤 인물에 대한 표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현대인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평화의 상징이라는 비둘기가 도시에서 차지하는 위치이다.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도시 공해의 원인이기도 한 비둘기. 양아치의 다른 작업들이 그러하듯 작품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도 확정되고 고정된 의미층은 늘 슬쩍 비껴간다. 그런가 하면 비둘기는 새이다. 하늘을 나는 새. 하늘을 난다는 것은 자유로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현숙씨에게는 불가능한 시선. 그 시선을 비둘기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비둘기의 시선은 감시카메라의 시선과 같은 층위에 있기도 하다.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는 감시카메라. 실제도 비둘기 현숙씨 시리즈에서는 감시카메라에 대한 이야기가 전면에 들어나고 있지는 않지만, 비둘기-새-감시카메라는 동일한 시선의 층, 나아가 의미의 층에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양아치의 작업은 늘 우리의 예상을 비껴간다. 예상했던 매체에서도 비껴가고, 예상했던 스토리에서도 비껴간다. 과거와 현재를 주무르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전시와 설치, 비디오와 공연이라는 장르의 벽도 깨버리고, ‘양아치 식’의 내러티브를 구성해 낸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양아치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양아치는 앞으로도 계속 자신만의 미디어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늘 그의 새로운 이야기와 형식을 설레이며 기다리며 ‘양아치의 미디어’를 기대하게 될 것 이다.